- [성경본문] 요한계시록3: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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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죽어가는 교회가 소생하려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이제 다섯 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가 소개됩니다. 사데 교회는 가장 큰 책망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 표현이 이러합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우리가 병원에, 특히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습니다. 코마 상태라고 하지요. 숨은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없습니다. 스스로 생명이 유지되지 않아요. 무언가에 의지하며 생명이 간신히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얼굴에는 산소호흡기가 씌어져 있고, 혈관에는 링거르가 꽂혀 있어, 겨우 겨우 몸에 필요한 영양이 공급됩니다. 병상 앞쪽에 환자의 나이와 함께 이름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거기에 있음은 아직 생명이 붙어 있다는 뜻이죠. 그러나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의 모습을 영국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불꽃이 꺼져 갑니다. 예배당은 고풍스럽고 훌륭한데 정작 주일이 되어도 성도는 나이가 많이 드신 성도들 몇 분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꿈나무들인 아이들이 없으니 생동감이 전혀 없습니다.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자연히 문을 닫게 될 것이고 건물은 경매에 붙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 상황을 예측하는 목사의 멧세지는 형식적입니다. 복음이 가질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은 이미 사라졌어요. 말씀에 목숨을 걸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리 유지하고 보수나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요? 2절 초반부에 보니 “그 남은 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가 처음에는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한때 영적 부흥이 있었던 교회에요. 그런데 점차적으로 가라앉으면서 물이 빠져나가듯이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 남은 것이 얼마 없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사데 지역은 소아시아, 오늘날의 터키, 내륙 쪽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로써, 물질적으로 부강한 도시였고, 그 지대에 고산지대에 있어서, 요새로 쓰기에 중요하니,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섬유산업이 발달해서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패션의 도시였습니다.
2천 년 전의 소아시아는 아주 부유했습니다. 당시 독일, 영국, 프랑스는 변방이었습니다. 미개하고 가난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요정이나 마술을 믿는 아주 미신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나라 들, 즉 로마, 그리스, 터키, 이집트 등이 최고로 부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유한 나라 중에 하나인 터키에는 크리스챤이 많으니 당연히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와 흡사합니다. 잘 삽니다.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니 그 왕성했던 교회들이 서서히 병들어갑니다. 교인의 수는 줄고, 주일학교는 사라지고, 세상의 이목과 관심은 사라집니다. 오늘날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 개척교회가 성장할 확률은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죽어가고 있는 교회가 그래서 문을 닫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이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의 주체가 되신 성령께서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께서 떠나실까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증거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강력한 말씀의 선포와 함께 임하십니다.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고 바른 복음으로 외칠 때에 교회 안에, 개인의 심령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역동적으로 나타납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생계가 해결이 되고 생활이 안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놓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자랑이 들어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방법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합니다.
똑같아요. 광야에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니, 이미 그곳에서 터를 잡고 있었던 가나안 족속의 풍요로운 삶이 좋아 보입니다. 저들을 따라 저들의 방법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 안에는 다산과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이 있었어요. 그 영적구조 안에는 도덕적으로 비윤리적이고 영적으로는 방종과 음행이 있습니다. 파괴적입니다.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고 영적으로 눈이 멀게 만듭니다. 그러나 좋아 보이는 거에요.
세상적인 방법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립니다. 성령의 역사가 중단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지 못합니다. 심령을 찌르고, 새롭게 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새 삶으로 살게 하는, 복음이 능력이 사라지니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입은 웃고 마음은 즐거웠던 것 같은데 심령은 여전히 허전합니다. 진정한 JOY, 심령에 참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하는,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그 영혼의 기쁨이 없어요.
자꾸만 세상적인 방법으로, 소위 Fun 문화, “재미 있었나~! 다들 즐거웠나?” 가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재미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들어가야 할 강력한 영적 야성이 서서히 잠들고 병들어 죽어갑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3장 1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곱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바로 예수님 이시죠. 그는 일곱영, 즉 성령을 말씀합니다. 왜 일곱인가? 숫자의 의미로 볼 때 완전수, 그러니 부족함이 없으신 성령님, 그분과 도움을 받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일곱별이라고 이어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별’이란 주의 신실한 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의 모든 종들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신 예수님께서, 사데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죽은바와 다를 바가 없다” 이어 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실낱같은 여전히 남아 있는 소생의 여지가 있으니 그것을 굳건하게 하라”
3절입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젖었던 그 감격과 그 감동을 다시금 상기하고 지금은 그러하지 못함을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찬송가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다시 주를 만났을 때 죄악으로 몹쓸 병든 몸/조용히 내 손 잡아 이끄시며 병든자여 일어나거라/눈물 흘리며 참회하였었네 나의 믿음이 뜨거웠었네/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길을 잃었네/ 3. 내가 이제 주를 만남으로 죽음에 길 벗어나려네/ 변찮는 은혜와 사랑 베푸신 그 분 만이 나의 구세주/주 예수 따라 항상 살리로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리라/할렐루야 주를 만난 이기쁨 영광의 찬송을 돌리리"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께서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교회의 모습대로, 원래의 주의 종의 모습대로, 원래의 성도의 모습대로,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교회를 건강하게, 이웃을 따뜻하게, 가정을 행복하게” 말씀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롭게 되는 역사로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연고라”
사데 교회 말씀을 하시며 옷 얘기가 자꾸 등장하는 것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그곳이 섬유산업으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패션의 고장이죠. 그런데 흰옷이라고 했습니다. 흰색은 거룩의 상징입니다. 순결의 상징이에요, 그러므로 순결한 신부는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이 기독교문화 성경의 문화를 따른 서양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시대고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환란과 핍박 속에도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바알의 발에 입 맞추지 아니한 7천명의 남은자들이 살아 있다고 의기소침하여 “차라리 나의 생명을 거두어가소서~!” 하나님께 간청했던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힘들 때에, 지칠 때에, 광야와 같은 인생살이에서, 어찌하든지 주의 뜻대로 살려고, 몸된 교회를 섬기며 애쓰다가, 그래도 지칠때가 있습니다. 왜 없겠어요? 그럴 때에 낙심하고 낙망하고, 그럴 때에는, 여러분 혼자가 아니고, 같은 처지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인내하며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음을 아시고 저들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혼자가 아님을 아는 순간 힘이 되고, 이미 그 길을 걸어가서 정금 같은 모습으로 믿음의 용사가 된 자들의 경험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힘이 납니다. 격려가 됩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옵기는 여러분은 이렇게 새벽으로 일어나 믿음의 행진을 해나가는 여러분은, 기도응답의 간증을 가지시고, 그 산 간증을 가지시고, 비슷한 어려움과 처지에 있는 의기소침한 성도들을 찾아가 새롭게 세우시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5절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5절 말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모습이 이 땅에서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간 후에 입성할 때에 저 천국에서의 영광의 모습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거룩을 지켜 행하는 자, 믿음을 지키는 자, 하나님께서 흰옷 입은 자로 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역사를 감당하는데 4절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에 그와 같은 자들이 남아 있다고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천국만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입니다. 흰옷을 입은 자들이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 땅에서도 역사를 이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이룸에 주님과 더불어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영광입니까? 이 복된 인생, 승리로운 인생이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환란과 핍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키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요한 계시록의 주제입니다. 오늘도 주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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