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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31]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운영자 2024-01-26 추천 1 댓글 0 조회 273
[성경본문] 사무엘상26:5-13 개역개정

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13.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사무엘상 26장은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또 다시 살려준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사무엘상 24장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는 것을 보았어요. 엔게디 지역의 동굴 안에 볼일을 보러 혼자 들어 왔었던 사울왕을, 다윗은 죽이지 않았어요. 주께서 기름으로 부으신 자를 자기의 손으로 죽여 범죄 하지 않겠다는 다윗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때의 상황과 여러 모로 비슷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사울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다만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물건만 취합니다. 24장에서는 사울의 옷자락을 살짝 베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의 물병과 창을 취하였어요. 다윗이 밤에 야영 중인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잠자고 있는 사울왕의 침상 곁에 있는 물병과 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우리가 배우는 영적 교훈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 왕을 자기 손으로 해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선한 자를 보호하실 것이고, 악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발로입니다.

 

사울 왕에 대하여 다윗이 무죄하다는 것은 사무엘상 24장에서 사울 왕이 자기 입으로 시인한 바가 있습니다. 2417절 말씀입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

 

그러나 십 사람들의 밀고로 다윗이 하길라산에 은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은 다시금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추격하기 시작하였어요. 이러한 사울의 행위는 다윗의 정직성과 하나님의 뜻을 확증한 이후의 대적 행위라는 점에서 더욱 악한 죄악이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완악해지는 사울 왕에 대하여 다윗은 변함없는 순전함으로 그를 대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일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인도하심과 쓰임을 받았던 사울은 이제 더는 아닙니다. 그의 교만과 왕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이미 하나님은 그를 떠났어요. 그러니 계속해서 세상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 그의 눈과 마음을 멀게 만들었어요. 세상이 그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복된 인생입니다.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달라도 많이 다른 것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내 삶을 운전하면, 그 어느 누구라도 세상에서 패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겠어요? 결국 "누가 내 인생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가?“ 이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는, 누가 내 삶을 주도하는가? 누가 내 인생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를 믿고 살아가는가?" 로 결정됩니다.

이제 본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의 표본인 다윗과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울왕, 그러나 하나님이 떠난 자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울왕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위였습니다. 추격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이 그 마음에 가득 차니 그가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삼상 24:17-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왕권에 대한 세습의 욕망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기를 결심한 이래(삼상20:31) 다윗에게 은혜를 입으면서도 그의 생명을 쫓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도전으로 하나님과 직접적인 원수가 되는 행위입니다. (참조,12:3; 22:22; 26:7,8; 44). 이미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2) 이와 같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직접 대적하십니다.

사울 왕의 사욕에 사로잡힌 마음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위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친히 대적하시어, 모든 일에서 패하고 망하게 하십니다.

 

보십시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울의 군사들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파수군의 사명은 깨어 있어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파숫군들이 잠들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성경이 말씀합니다. 26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삼상26:12)

 

하나님께 군사들을 잠들게 하신 것이에요. 사울 왕의 모습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의 진영에 들어왔는데도 사울도 군사들도 모두 잠에 떨어져 무방비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니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쓴다 할지언정, 그 마지막 모습은 지는 것이요, 실패하는 것입니다.(참조,21:4-6; 9:11).

 

3)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 가운데 친히 개입하시고 심판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관계된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 주시리라고 믿고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고난 중에서 '내가 여호와께 피하나이다'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말년에 시편 23편을 찬송시로 썼습니다. 그 시의 한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저는 이 구절이 정말 맘에 듭니다. 다윗은 경험을 통해 그런 표현을 했겠지요. 무슨 뜻입니까? 잘못도 없는데 나를 아주 못살게 구는 자가 있다면, 그럴 때, “그래 이판사판이다 한번 붙어보자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아도, 그 원수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의 편이 되어주셔서, 보란 듯이 그 원수 앞에서 잘 되는 역사를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지난 20223월 네팔 방문 이후로 그해 8월까지 선교지에서 많이 힘들었어요.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체중은 5킬로나 줄어들었습니다. 근거없는 루머를 퍼뜨리는 기자들과 현지인 동역자의 배반때문이었습니다. 아침이면 학교로 들이닥치는 기자들의 보도와 배반한 동역자의 말을 믿는 교육기관의 고위관리는 색안경을 끼고 김금래 선교사를 의심하였습니다.

 

그 루머라는 것은 학교를 운영한다는 명목으로, 한국교회에서 들어오는 후원금을 가로채서 착복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악성 소문은, 급성장해가는 기독교회의 모습에 한편으로 불안하고 한편으로 질투하고, 그래서 여하튼 기독교라는 말만 들어가면, 거짓말이라도 신문에 실어서, 대중을 선동하고, 기독교를 미워하게 하고, 해당된 기독교 외국인에게 불명예를 씌우고 결국 쫓아내려고 하는 강경 힌두교도들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설을 썼어요. 학교부지를 구입하면서 자신이 소유주가 되었다. 교사들에게 적합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발단의 배경은 한 교사를 해직하면서였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하여 계약이 끝날 때 권고사직을 하였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그런 루머를 퍼뜨렸어요.

 

얼마나 헌신하며 희생하며 그 학교를 키워왔는데 그런 억울한 내용을 들을 때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그 루머가 사실로 바뀌어서 결국 그 나라에서 쫓겨나면 학교의 미래는 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타지에서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눈물로 하소연하며 기도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어요.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는 그 상한 심령에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었으니, 미가서 77절과 8의 말씀이었다고 했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7:7~8)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의인의 손을 들어주시는 공의의 하나님 아버지 십니다.

땅문서에 저와 제 아내의 이름이 없음이 증명되었어요. 또한 땅 구입금이 한국에서 학교통장으로 들어온 것들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수익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김금래 선교사 통장에서 학교통장으로 후원금들이 들어간 것이 은행증명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육부 관리 중에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 사건의 내막을 다 알게 되었어요. 악한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을 들어 역사하십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그 케이스요, 요셉에게 은총을 베푼 보디발이 그 케이스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 사건을 통해 음모는 무너지고 결론이 나게 되었어요. 김금래 선교사는 한국인으로서 그동안 고생 고생하며 학교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학교 발전을 위해 정식 워킹비자를 받게 되었어요. 학교가 제대로 설 때까지 교장 그 위의 권한을 갖는 Director 즉 학교발전책임자로 임명받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2:19)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인내하시며 마침내 보란 듯이 잘되어 승리하시는 여러분이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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