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역대상19:1-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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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2. 다윗이 이르되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가 전에 내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의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리라 하고 사절들을 보내서 그의 아버지 죽음을 문상하게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러 하눈에게 나아가 문상하매
3.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존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의 신하들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정탐하여 전복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는지라
4. 하눈이 이에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을 볼기 중간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5.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가서 그 사람들이 당한 일을 말하니라 그 사람들이 심히 부끄러워하므로 다윗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왕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오해로 악의를 품고 대적해 올 때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동편에는 암몬 족속이 나라를 이루어 영토를 보유하고 살았습니다. 오늘날은 그 영토가 요르단 국가에 속해 있어요. 성지순례를 하게 되면 요르단 안에 암몬성을 방문합니다. 암몬 족속은 그 기원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 그의 둘째 딸이 낳은 아들 그 이름이 벤암미에요. 그의 후손에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암몬 족속을 이루고 부족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때 다윗은 이 암몬 족속의 왕이었던 나하스에게 은총을 입었습니다. 죄 없는 자로 사울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던 때에, 암몬 땅으로 피신한 다윗은, 당시 왕이었던 나하스의 도움을 받아 그 어려운 때를 극복해 낼 수가 있었어요.
어느 날 다윗왕에게 그 나하스 왕의 임종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다윗은 그가 받았던 나하스의 은혜를 기억하며,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조문을 위한 사절단을 보내게 됩니다. 다윗왕이 잘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그래야 하겠지요. 특별히 재기하기 어려운 날들을 보낼 때, 누군가로부터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면, 잊지 말고 갚아야 하겠지요. 그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여러분은 ‘결초보은’ 이라는 한자성어를 아시나요? 그 뜻이 “죽어 혼령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라는 뜻이에요. 그 한자를 한자씩 풀어보면 맺을 結, 풀 草, 갚을 報, 은혜 恩자를 사용하고 있어요. 이 사자성어의 배경 스토리가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 군주 위무자에게 애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병석에 눕게 된 위무자는 아들 위과를 불러 자신이 죽으면 애첩을 재가시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위독해진 위무자는 마음이 바뀌어 자신이 죽으면 애첩도 함께 묻으라고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긴 전혀 다른 두 유언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들 위과는 애첩을 순장(殉葬)하는 대신, 다른 곳에 시집보내면서, “난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을 갖고 계실 때 남기신 말씀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들 아니겠습니까?
세월이 흐른 후 이웃 나라가 진(晉)나라를 침략했을 때, 한 전투에서 위과의 군대가 적군의 공격에 몰려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잡아매어 온 들판에 매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적군들은 말을 타고 공격해오다 거기에 걸려 넘어져 이리저리 나뒹굴었어요. 위과는 그 틈을 타 공격해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위과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알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시집보내 준 여자의 친정아버지요. 그대가 첫 번째 유언대로 내 딸을 살려 주어, 그 은혜에 보답했다오.”
그 전쟁터에서 들판에 풀을 서로 묶어 은혜를 갚았다 하여,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사자성어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러한 인간성을 갖고 있었기에 부하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존경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은혜를 갚으려고 행한 호혜가 그만 오해를 사고 맙니다. 어떤 오해일까요? 함께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존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의 신하들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정탐하여 전복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는지라”(대상19:3)
하눈왕 곁에 있는 신하들이 아직 통치의 경험이 없는 새로운 왕에게 보고하기를, “다윗이 보낸 자들은 순수한 조문 사절단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 장례식에 온 것은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전복시킬 목적을 갖고, 미리 땅을 엿보고, 정탐하러 온 것입니다.” 왜 이런 잘못된 보고를 할까요?
그것은 다윗이 왕이 되면서 전쟁마다 이기고 영토를 확장하고, 세력이 너무 막강해지자 이제 자기들에까지 손을 뻗치기 위해서 공작을 꾸미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도시 ‘랍바’는 천연적인 요새로 침략하기 어려운 곳이었으므로, 다윗이 미리 사람을 보내 정찰케 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었어요.
잘못된 보고인데도 경험이 부족해서 일까요? 하눈왕이 신하들의 말을 100프로 믿고 그 조문 사절단에게 수치를 가하고 돌려 보냅니다. 4절 말씀이 그 내용이에요.
“하눈이 이에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을 볼기 중간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대상19:4)
조문 사절단원들의 수염을 깎고, 그 의복을 볼기 중간까지 자른다는 것은 아주 상대방을 능멸하고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긴 수염은 그 사람이 자유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식일 뿐 아니라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깎아 버리는 것은 그들을 노예 취급하는 경멸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죠. 조문 사절단의 겉옷 하단을 잘랐으니 이 또한 지독한 모욕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원들이 입던 옷은 속옷이 없이 통으로 된 옷 위에 늘어뜨리는 겉옷만을 입었기 때문에, 옷을 엉덩이 부분까지 자른다는 것은, 하체가 다 드러나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사신들이 그 일을 얼마나 수치스럽게 여겼겠어요. 그들이 수염이 잘린 자신들의 모습을 보이기가 창피하여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오지 아니하고, 다른 자를 통해 다윗에게 정황을 보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먼저는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추측하여 왕에게 보고한 신하들의 모습이 잘못됐어요. 그리고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절단에게 수치를 주어 돌려 보낸 하눈 왕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 없이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않고, 마음에 믿고 결정하는 행위는 분명 잘못된 자세입니다. 사실 진위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한쪽 편의 말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당사자의 입장도 들어야죠.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율법은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죄를 정할 때 한 사람의 증거로는 부족하고 두 증인의 입이나 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신약시대에도 이러한 율법은 유지되어 장로에 대한 송사를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염이 깎이고, 수치를 당하여, 예루살렘에 곧바로 오지 못하는 신하를 향한 주군 다윗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5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가서 그 사람들이 당한 일을 말하니라 그 사람들이 심히 부끄러워하므로 다윗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왕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대상19:5)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다윗의 배려심 많고 부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절단은 수치를 당했으나 자신들의 주군이 이렇게 이해하며 위해주니, 다시금 힘을 내지 않겠어요? 졸지에 휴가를 얻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집니다. 그렇게 오해하여 조문 사절단을 욕보였다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용서를 구하는 의미에서 왕이 직접 쓴 서신이나 아니면 특별 사절단을 보냈어야 할 터인데 “큰일났다. 다윗이 대노하여 보복하기 위해 침공해 올 것이다.” 그렇게 여겼어요. 그러므로 전쟁을 준비합니다. 6절에 보니 은 천달란트를 사용하여 이웃 나라로부터 병거와 마병을 빌려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니 병거 삼만 이천대와 마아가 왕과 그의 군대를 고용하여 다윗의 군대와 전쟁을 치룰 준비를 하고 진을 쳤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어리석은 신하의 간언과 그 말에 사리판단 구별 못 하고 사절단을 욕보인 암몬의 하눈왕은 두려움 가운데 고육지책으로 전쟁을 치루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결과는 대패였습니다. 10절 이하 내용이 그것입니다. 다윗편의 장수인 요압과 그의 아우인 아비새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 암몬과 아람 연합군을 대항하여 그들을 물리칩니다. 그들이 다윗을 늘 곁에서 지켜 보아왔으니 전투에 임하는 그들의 모습도 다윗을 닮았습니다. 그들의 전투에 임하는 자세를 보십시오.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대상19:13)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믿으므로 전투에 임하니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도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에서 생사화복의 주가 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나라가 6월 3일에 선거를 통하여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합니다. 참으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눈과 같이 귀가 얇고 사리판단이 어두운 자가 아니라, 다윗과 같이, 자신에게 맡겨준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알아, 자신의 몸과 같이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넓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인사정책을 잘 행하며, 국방을 철저히 하며, 외교적으로도 이웃나라를 존중하여, 상생을 도모하는 훌륭한 대통령이 선출되도록 이 새벽에도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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