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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07] 약하지만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운영자 2018-02-09 추천 1 댓글 0 조회 617
[성경본문] 출애굽기3:10-14 개역개정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약하지만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

 

양들에게 더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 호렙산에 이른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 그러나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는 그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심에 떨기나무 그리고 꺼지지 않는 불로 나타나심은 그 깊으신 뜻이 있었습니다.

 

떨기나무는 ‘세네’라고 불리는 일종의 아카시아 나무인데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나무도 그 모습이 다양해서 위풍당당하게, 곧게 자란 나무들은, 재목으로 쓰임 받는가 하면 또는 가지가 무성해서 그늘을 드려,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떨기나무는 그야말로 볼품도 없고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땔감정도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떨기나무는 그 당시 멸시받고 압제당하고 굴욕가운데 처해 있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불이 붙었다’ 라는 것은 태워 없애고자 하는 것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심판’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그러면 죄를 지을 때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옥은 뜨거운 불, 꺼지지 않는 ‘불 못’으로 묘사됩니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9장 48절과 49절에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거기에서는(지옥)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지옥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곳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불타는 떨기나무, 그러나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애굽에서 나타난다 할 지라도....., 이 모습은 바로 바로왕에게 임하게 될 열가지 재앙이 될 것입니다.......그러나 그 진노와 심판의 불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남는다. 불타지 않는다. 불이 타고 있으나 불타서 없어지지 않고 생존하게 된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장차 주님께서 구름타고 재림하실 때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때에도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불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겠으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 심판 중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말씀하셨는데요, 당시에 고대로부터 종들은 신발을 벗고 다닌 것에서 연유됩니다. 당시 종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는 곧 종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발을 벗는다 하는 것은 “전능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 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직접적인 이유는 지금도 네팔의 신전이나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요, 신발에서 떨어지는 먼지나 티끌로 인하여, 신이 임재하는 거룩한 장소가 더렵혀지지 않도록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말씀에 보니 모세가 선뜻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표현은 그의 과거의 아픈 모습,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자 했었으나, 이스라엘 동족의 동조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항의를 받고, 거꾸로 애굽병사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 바로왕이 그를 죽이고자 했었던 그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자신은 왕자였습니다. 당시 최강의 나라 애굽, 그 나라의 왕자로 40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과 권세가 있었어요. 위풍당당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동족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으리라 여겼었어요. 자만심이 가득찬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사도행전 7장 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모세)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자기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 고 믿고 살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동족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손을 통하여,” 다른 말로는 “왕자의 손을 통하여,” 그런데 아니었던 것이었어요. 오히려 그 일로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땅에서 무명의 목자로 보낸 세월이 40년인 것이에요.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에요. 그러니 사명도 잊었어요. “내가 누군가?” 그처럼 어머니로부터 어릴적부터 들었습니다. 배웠습니다. 가슴에 새겼습니다. “모세야,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물에서 건져주셨어. 그래서 네 이름이 모세란다. 그러기에 너는 고통받고 있는 네 동족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할 거야! 너는 그것을 잊으면 안 돼~!” 그래서 모세는 뭔가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살인자요, 도망자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런 소리를 부모로부터 듣지 않았나요? 이 자리에 청년들은 지금도 그런 소리를 부모로부터 듣지 않습니까? “너는 할 수 있어, 잘 할 거야!” 그래서 정말 그런 줄 알고,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고, 수고하고...., 그리고 뭔가 해보려고 해요. 그런데 잘 안돼요. 성공하지 못해요. 가라앉아요. 그래서 자괴감에 빠져요. 결국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난 안돼~! 노력해도 않돼~!”

 

건전한 자아상은 아닙니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습니다. 실패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트라우마죠. 충격이 되어 실패와 좌절감이 가슴에 꽉 차 있어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때부터가 시작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그러시려면 40년 전에 저를 찾아오셨어야죠? 제가 왕궁에 있을 때에, 왕자의 권한과 능력과 패기와 권세가 있을 때에, 그렇게 내 동족을 위해 뭔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고 있을 때에 오셨어야죠? 이제는 늦었습니다. 보세요. 나는 이제 나이도 먹었고, 무명의 목자일 뿐입니다. 오늘도 그저 광야를 전전하고 있어요. 내 일은 그저 내 양도 아닌 장인어른의 양들을 치며, 보세요, 나는 그저 내 집도 없는 데릴사위일 뿐이라구요.”

 

안 그렇겠습니까? “아~, 옛예날이여~!” 그 노래 가사처럼...., 패배감, 실망감, 좌절감, 의욕상실.....,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한번 큰 소리로 따라서 하십시다. “믿음의 사람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함이 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 그 누군가 도와준다고 해도, 일의 주도권이 내게 있어, 내가 한다는 생각, 왜 나는 특별한 존재이니까!

그래서 “I am something!” 그런데 이처럼 철저히 부서지고 나서는 생각이 “나는 아냐! 나는 그런 존재가 못 돼~! 그래서 "I am nothing" 그런데 이 모습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변합니다.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I am special used by God."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특별한 존재"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단계에 성숙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멧세지에요. 하나님은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교만한 사람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등감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능을 알아요, 그래서 겸손해요, 그러기에 “주여,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니 주여 나를 도와주세요. 그러면 내가 일어나 주신 일 감당하겠습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주의 능력으로 감당하겠습니다.”

 

그래서 잘 되어지는 일이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 채려고 하지 않아요. 자신이 높아질 이유가 없어요. 그저 주님의 영광만 나타나는 거에요. 이 모습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계속 쓰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렇게 겸손하게 시작하고, 나중에는 그 왕좌에 자신이 앉는지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이단의 교주와 같던지.....,, 또 하나는 계속적인 성장이 없어요. 멈추게 되요. 존경도 잃어요. 사람도 떠나요. 그 때서야 깨달아요. 늦었어요.

 

이처럼 무능함을 인식한 모세에게 내리시는 처방전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일어날 것입니다. 12절 말씀 첫 문장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형통하였더라. 범사가 형통하였더라. 저가 행하는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하였더라” 요셉의 삶 아니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잃었어요. 그저 인생의 가장 낮은 자리 노예로 팔렸지 않았겠습니까? 뭐가 남은 것이 있어요? 몸둥아리 하나 뿐이에요. 아니요, 그런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식지 않는 꿈이 있었습니다. 곡식 단 열한개가 일어선 자신의 곡식 단을 향해 절을 합니다.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을 합니다. 그 꿈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게 소망입니다.

여러분, 이 꿈이 오늘도 여전히 여러분의 가슴을 울리고 있고 휘젖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 말입니다. 그 꿈을 안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역사가 일어나는 곳은 아버지의 사람을 독차지 할 때가 아니었어요. 채색옷을 입고 있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을 그 편한 때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저가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아무것도 의지 할 수 없었던 그 인생의 그 곤고한 때에 정말 그 누구도 의지할 것 없어 하나님만 바라 볼 때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말씀을 맺습니다.

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떠오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 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약할 때에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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