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출애굽기20: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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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거짓 증거하지 말라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증거하지 말라”입니다. 증거라는 말이 들어 있으니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에서나 쓸 수 있는 그런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증거’란 말은 더 넓은 의미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 원어로 ‘에드’ 라고 하는데 그 뜻이 남 앞에서 하는 ‘말’ 또는 ‘대답’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거짓증거를 ‘비아볼로스’ 즉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서 거짓 선전을 하는 소위 ‘중상모략’ 이라고 말씀하며 또는 ‘브라스페미아’ 로도 쓰였는데 이는 '당사자 앞에서는 그를 칭찬하고 돌아서서는 헐뜯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영어로 표현하면 'Back-bite'라고 합니다. ‘뒤에서 깨문다’ 라는 뜻으로 ‘험담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보니 “네 이웃에 대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그 뜻은 “네 이웃을 대항하여”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해하기 쉽게 풀어 말하자면 “너를 위해 누구에게든지 거짓말 하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네 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남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 그러면 반대말은 어떻게 될까요? “어떤 상황에서든지 또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진실’만을 말해라” 가 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는 은연중에, 알게 모르게, 어떤 상황을 쉽게 만들려고, 사실을 바꿔 말해요. 제가 오랜 세월 뒤에 고국에 와서 보니 정말 그래요. 음식배달을 시켰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도 안와요. 다시 전화했어요. “예, 금방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안와요. 그런가하면 주사를 맞는데 물었어요. “주사 아파요?” 그랬더니 간호사가 말했어요. “이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 그런데 데게 아파요. 그런가하면 제가 양복을 사러 갔는데 좋아보여서 제가 입고 거울 앞에 서니 상점주인이 하는 말이 “아, 선생님께 딱 맞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또 다른 옷을 입어도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요. ㅎㅎ~! 어떤 옷을 입어도 꼭 그렇게 말해요. 잘 어울린다는 거에요. 제가 아마 열 번 바꿔 입어도 그렇게 말할 거에요.그러니 “정말 그런가?” 하고 제가 혼돈스럽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좀 난감합니다. 예배 시간에 얼마나 피곤하신지 졸아요.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헐~! “차라리 말씀이나 하지 마시지~^^!”
어려운 상황을 쉽게 만들고 또는 미화시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지만...., 습관이 되면 곤란합니다.진실해보이지 않지요.
본문의 제9계명에 대하여 유명한 신학자인 '칼빈'(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9계명을 주셨는가? “조금이라도 과장됨이 없이 진리만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모든 '거짓'을 배격하고'진리'만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성도 여러분, 말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나오지만 일단 말이 되어 우리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 이미 마음의 통제를 벗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말 스스로의 위력을 나타내는 독자적인 것이 됩니다.그러므로 말이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말에 실수가 없도록 입에 재갈을 먹여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3장은 한참이나 이 말의 절제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3장 2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이런 상황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특히 남자들보다 세배가 더 말을 많이 하시는 여성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더 많이 고민하시겠지요? 그럴 때 어떠해야 할까요? 예,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특별히 남에게서 들은 말은, 검증이전에, 다른 누구에게 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그 말이 그 당사자에게 해가 될 말이라면 쉽게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네 이웃을 향하여 거짓증거”가 될 확률이 적어도 50%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거짓말을 할까요? 그 근원을 찾아가 보면 이는 죄로 말미암아 기인됩니다. 죄의 기원은 사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단의 별명이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말쟁이 (Liar) 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하와를 거짓말로 속인 사단,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은 그 핏속에 죄성이 배어있어 거짓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인간의 그 죄악된 모습이 사단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직시하시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누가요? 그 마음에 거짓의 영이 있는 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罪性(죄성)은 어느 때에 거짓말을 하게 만들까요? 크게 두 가지로 이유에서 거짓말합니다.
첫째,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떠한 안좋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그리고 그 책임이 나에게 전가될 때에, 두려움이 임합니다. 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거짓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거하라고 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하게 되지만 기근을 만납니다.견뎌야 했는데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때에 애굽사람들을 만나면서 두려움에 빠집니다.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내 아내가 예쁜데 나를 죽이고 내 아내를 빼앗으려고 한다면 큰일이다.” 그래서 아내인 사라에게 부탁합니다. “아내라고 말하지 말고 내 누이라고 말하시오.” 거짓말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생명은 건지지만 아내는 빼앗깁니다. 저는 그 상황을 묵상하다가 생각해 봤어요. “사라가 참 대단한 여인이다. 왠만하면 왕의 부인이 되어 온갖 부귀영광을 다 누리고 살 법도 한 대, 내 부인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라고 시킨 남편에게 다 돌아오다니....!!ㅎㅎ~!”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남편이 불쌍해서 와 준겁니까? 역시 열국의 어머니다운 사라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모습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아브라함,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초기 아브라함의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택한 족속의 첫 번째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아내를 다시금 돌려받게 하십니다.
제가 선교사로 살았던 필리핀 사람들이 물론 다는 아니지만 너무 많이 경험했습니다. 순간의 모면을 위해 거짓말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팔에 오니 네팔 사람은 안그런데 인도사람들이 또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은 스페인 아래에서 그리고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써 억압하는 약소민족으로써 살았습니다. 때로 다그치는 강대국의 억압에서 생존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들 속에서 오랫동안 산 것이 주 요인이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하다못해 길을 못 찾아 물으면 모르면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꼭 잘 아는 것처럼 어디라고 가르쳐 줘요. 그런데 그 말대로 찾아가면 없어요. 찾는 곳이 없어요. 더 찾기 어렵게 만듭니다. 모른다고 말하기가 두려운 거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에요.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두려움 상황이 올 때에 행여나 거짓말 하지 마시고, 그저 진실되게 말하시고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고 상황은 더 악해져 갑니다. 양심이 찔림으로 고통당합니다. 거짓의 영 사단이 휘감아 끌고 갑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교만과 허영 때문입니다.
이 또한 죄성에서 비롯됩니다. 사단의 성품입니다. 왜 사단이 천사였다가 타락하였습니까? 교만과 허영 때문이었지요.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해서 그 허영심에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사단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의 처지를 망각하고 교만해져서 창조주인 하나님을 대적하려 했습니다. 그는 천사장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하나님의 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서 28장 17절에 사단을 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참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체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고자 할 때에 포장하려 합니다. 더 나은 인정을 받고자 할 때에 자신을 부풀려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면 초라해 보일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거짓이 통하면 또 우쭐해 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교만과 허영이 있는 사람은 속이 빈 사람입니다. 심령이 허한 사람이에요.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고 했습니다. 외적으로 치장합니다. 말은 그럴 듯합니다. 과시하기를 좋아합니다.학력위조를 합니다. 주의 종들 중에도 있어요. 어렵고 힘든 사람들 곁에 있기 보다는 높은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합니다. 이유가 있어요. 교만입니다. 자신이 그 수준의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또 그것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러한 모습이 반복이 되고 습관이 되면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제 9계명을 어기는 거에요. 먼저는 자신을 속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망각합니다. 하나님의 눈을 어떻게 속이겠어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까요?
성도 여러분, 진실의 문제는 신앙의 중심적 과제입니다. 저는 십계명 강해를 시작하면서 십계명은 ‘행복지침’이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복 주시기 위해서 주신 계명, 먼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그리고 피조물과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를 보여주고 따라 행하면 복이 임하는데 자자대대손손 복이 임한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거짓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자의 유익을 구하고자 거짓증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갑니다.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에게 복이 임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옛사람은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말씀합니다. 에배소서 4장 2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 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이 진실된 모습으로 세상의 빛이 되시고 소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언제고 진실하심으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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