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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정하여 드리는 기도
운영자 2019-04-26 추천 3 댓글 0 조회 888
[성경본문] 사도행전3:1-10 개역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시간을 정하여 드리는 기도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개인의 신앙증진에 참으로 유익합니다. 오늘도 새벽에 시간을 정하여,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드림으로써,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찬송과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는 시간이지요. 오늘도 기도시간을 정하여 새벽에 나오신 여러분들께 우리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선교지에 있을 때, 단기팀이든 개인적이든 저와 함께 선교사역을 둘러보고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람들이 꼭 질문하는 것이 있어요. 이 어려운 환경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오셨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네팔 카트만두는 사방을 둘러봐도 우상천지입니다. 힌두교와 불교 일색의 많은 신들의 형상들이 그야말로 사원에도 거리에도 주택가에도 그리고 집안과 바깥에도 즐비합니다.

 

이런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코에는 신들에게 바치는 네팔 특유의 향 연기 냄새가 머리를 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귀에는 이따금씩 땡그렁, 땡그렁, 땡땡땡땡, 사원마다 종소리가 그치지 않고, 그리고 이웃집에서는 아주 독실한 힌두교도인들이 종교예식을 행하며 울리는 손 종 소리가 찌르릉 찌르릉 울려 퍼집니다.

 

그러한 우상중심의 환경, 사람들, 이웃들 속에서 어떻게 신학교와 리빙스톤학교와 교회개척 사역을 일구어냈으며, 개인적으로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여년이 넘도록 어떻게 지치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고 믿음을 지켜갈 수 있었느냐???? 그것이 궁금하다는 거예요. 아마도 거기에 계시면, 머리가 아파서 신앙 지키시기가 어렵게 느껴지시는가 봐요.

 

그때에 저의 대답은 늘 동일합니다. 새벽에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교사님들이 다 새벽제단을 쌓는 것은 아닙니다. 피곤하고 지치지요. 현지인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는 좀 다르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섬기는 교회가 불문명하지요. 그러니 어느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려야 할지 불분명합니다.

네팔에 하나밖에 없는 한인교회는 카투만두 외곽에 살고 있는 선교사들에게는 멀기도 하지만, 새벽기도회를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나간다고 해서, 그 누구도, 아무도, 볼 사람도, 말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 중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새벽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저의 상황은 좀 달랐습니다. 신학교가 있어요. 2000년도에 저와 인도 북장로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설립한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은 70여명의 학생들 중에 90프로가 기숙사 생활을 합니다. 결혼 안했으면 무조건 기숙사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24시간 학생들은 통제를 받는 것이에요. 새벽 430분이면 모두가 일어나서 5시면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이게 참 한국식인데요. 그런데 제가 한국선교사이니까 운영이사회에서 제가 고집을 부리고 시작한 새벽기도회가 이제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신학생들은 기도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떻게 하루가 시작되어야 하는 지를 배웁니다. 우상과 귀신이 들끓고 있는 나라에서 교회개척자들로 훈련을 받는 저들이 집중적인 기도없이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백전백패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요.

 

한편 저는 그래도 본을 보여야 하는 설립자이자 교수이기 때문에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억지로라도 참여할 때가 종종 있는데 특히 전날 몸이 지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면 그렇지요. 그런데 이 새벽기도회가 영성을 살리고 유지시킵니다. 낮에 기도한다? 어림도 없습니다. 얼마나 바쁘게 일들이 돌아갑니까? 잠시도 시간 내어 기도할 틈이 없습니다. 그저 밥 먹을 때에 하는 것뿐이에요. 새벽을 기도로 드리지 못하면 서서히 영성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교지를 방문하신 분들에게 말합니다. 새벽기도회를 지키기에 그 나마 영성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그리고 함께 신학교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면 저들이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러하십니다. 가장 일어나기 힘든 새벽시간, 여전히 세상은 잠들어 있는 시간,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성경을 챙겨 들고, 주님 전으로 향하시는 여러분은,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열어 가시는 여러분들은, 믿음을 지켜가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에 먼저는 여러분 자신이 삽니다. 그리고 가정이 삽니다. 자녀들이 삽니다. 일터가 삽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구역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이 새벽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일로도 양보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왜요?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 보니 기도시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1)”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시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세 번씩(6:10; 55:17) 3, 6, 9(현재 시간으로는 오전 9, 정오, 오후 3)에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는 성전, 회당, 그리고 자기 집 옥상 같은 곳이었어요.

 

오늘 성경본문의 제 9시의 기도시간은 성전에서 세 번째 기도시간으로 저녁제사를 드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파트너가 되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드리는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갑니다. 그 기도의 전통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신약 교회와 구약 교회의 연계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거기에는 차이가 있었어요. 신약교회의 지도자들은 구약 교회에서처럼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리는 모습이 아니고 그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그들의 시간을 성별하였습니다. (6:4).

그리고 그 장소는 성전이었어요. 신약 교회에 있어서의 '성전'은 기도하는 장소이며 예배하는 장소이지 구약 교회에서와 같이 제사 드리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모여, 말씀으로 교육하고, 예배드리고, 친교를 했습니다(2:42, 46).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하셨으며(2:21), 바울은 성도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1).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 있어서의 건물로 된 '성전'의 개념은 다만 '만민이 기도하는 집'(21:13;56:7)이며, 예배드리는 집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러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왜 굳이 성전인가? 집에서도 기도하면 되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환경입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장소로 삼았다는 얘기에요. 강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곳을 기도장소로 택했던 것입니다. 시간을 정하여, 성전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통하여 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여러분과 제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 새벽기도를 통하여, 기도하는 집에서 기도하시므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못 걷는 자는 4:22절에 보니 40여세가 된 사람이었어요. 그는 출생 이후 지금까지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보면서 모든 인간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 출생 시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못 걷는 자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의 초점을 사람의 손길에 두고 살아갑니다. 적선을 원하는 연약한 존재에요. 물질을 주는 손길만을 바라봅니다. 이 사람의 그 40년간의 불행한 삶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은총에서 벗어나, 사람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요. 사람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가, 그 믿음의 만남이, 마침내 주의 종인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에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6)” 베드로와 요한이 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구원시킨 것은, 돈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 교회의 시작이 돈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존재', '속성', '능력' 등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 에만 저주받은 삶을 구원시킬 수 있고, 남들에게 구걸하는 삶으로부터, 이제는 주는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기에 유명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가 교황청에서 교황과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창밖으로 보니 각 지역에서 교황청으로 보내는 헌물과 곡식을 담은 가마가 마차에 잔뜩 실려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함께 보는 교황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과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하던 시대는 없네! 이렇게 풍성하지 않는가?”

그의 말을 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은과 금은 있으나 정작 있어야 할 예수의 그 이름이 권능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보는 이 걷지 못하는 자가 일어나는 기적의 역사는 누가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였는가? 그에게 권능이 있었는가? 그게 아니라 성령께서, 능력 주셨기 때문에, 일어났음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역사들은 보면서, 우리의 초점이 예수가 아니라, 사람에게 갈 때가 종종 있어요. 여기에서 문제가 불거집니다.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는 중에 기적을 행하는 자는 교만이 생깁니다. 타락합니다. 심지어는 이단의 교주로 발전합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아요. 이 사실을 부인합니다. 아주 철저히 부인합니다.

내 능력으로 말미암이 아니다. 그러니 나를 주목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12절 말씀으로 가서 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주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가 이 새벽에도 시간을 정하여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시간을 성별하여 새벽을 드립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 병자를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새벽으로 기도하시는 여러분에게도 그 놀라운 역사, 치유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예수로 말미암는 믿음이 여러분 가운데 있으므로 육체적으로는 고침의 역사, 영적으로는 소생의 역사, 심적으로는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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