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시편1: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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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일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복 있는 사람 (서론)
우리는 오늘부터 시편을 묵상해 나가고자 합니다. 전체가 150편으로 이루어진 아주 긴 책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시편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묵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에서 시편은 다른 성경들과는 구별되는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시편이 다른 성경책들과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1장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론의 시간으로 갖습니다. 내일부터 1편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시편 전체의 대 주제를 훤히 볼 수 있겠습니다.
구약성경은 크게 두 가지의 주제를 담고 있는데요. 그 모습은,
첫째, 하나님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죠. 사람을 만드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도 긍휼히 여기사 털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했을 때에는 40일 주야로 비를 내리게 하셔서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복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의 후손들로 이스라엘을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행동하시므로 역사의 주관자요, 돌보시는 자가 되셨어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행동을 기록한 책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소위 ‘모세5경’이라고 일컫는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책인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같은 책을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기록한 다섯책과 역사서에 하나님의 행동, 즉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면 안된다. 그래야 복을 받으며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진 책들을 예언서, 또는 선지서라고 부릅니다. 아시는 대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미가와 아모스, 말라기,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그 책 제목이 주어졌습니다.
반면에 시편은 첫째 주제인 ‘하나님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또 둘째 주제인 ‘하나님의 메시지’ 라기 보다는 그 주제가 ‘이스라엘의 응답’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편을 꿰뚫어보는 틀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들에 피는 아름다운 꽃들을 볼 때에 참 마음이 즐겁습니다. “아~! 참 예쁘구나~!” 울긋 불긋 단풍이 든 숲과 나무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겠죠. 그런가 하면 봄철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차가운 대지에 따스한 봄비가 내리고, 그러니 죽은듯한 대지가 생기가 돌고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면, 감사하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엇입니까? 우리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사람의 반응, 그런가 하면 믿는 사람도 고난을 당할 때가 있어요. 사업이 기울어요. 부도가 나기 일보직전이에요. 예기치 않은 질병이 찾아와서 가장이 병상에 누울 때가 있어요. 걱정이 되고, 두렵고, 아픔이 일고, 슬픔으로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있어요. 그럴 때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이시여, 어쩌자고 이러십니까?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 하겠습니까? 회복의 날이 언제입니까? 내가 너무 힘듭니다. 왜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보고만 계십니까? 주를 경외하고 순종하는 저를 언제나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까?” 이러한 내용이 시편의 주제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모세오경과 역사서 그리고 예언서의 내용들은 ‘위에서 아래로,’ 하나님 편에서 인간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라면, 시편은 ‘아래에서 위로’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모습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납니다. 첫째, ‘찬양시,’ 둘째는 ‘탄원시’입니다.
언제 찬양시를 올렸을까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에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실 때”에, 그리고 마치 목자의 모습처럼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야수로부터 생명을 보호하실 때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시며 안위하실 때에” 감사로 찬양으로 주를 노래합니다.
우리 인생이 늘 이렇듯 감사하고 좋은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천국이 필요할까요? 아마도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 땅에서 적어도 100년 아니 150년을 살게 해주세요.” 그러지 않을까요? 과연 만사형통으로 일관되는 삶을 산다면 주님을 찾을까요? 기도할까요? 주님과의 관계가 세상과의 관계로 전락할 것입니다.
둘째는 탄원시라고 했습니다. 언제 탄원시로 올렸을까요?
인생의 날에 먹장구름이 덮힐때에, 깜깜한 밤이 가시지 않고, 기다리던 따사로운 아침햇살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여겨질 때에........., 예를 들어 시편 22편이 그러한 탄원시의 내용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오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니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의 눈물섞인 탄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지 않습니까? 강단에 무릎을 꿇고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읽어가며 기도할 때면 제 마음에도 눈물이 흐릅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발달장애로 인해, 부부간의 결별, 낫지 않는 육신의 질병, 실직으로 기가 죽은 가장의 모습.....,
그런데 시편은 매 시들마다, 비록 탄원으로 토설적인 외침이 배어 있어도, 언제고 소망을 품고 결론을 맺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22편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결코 낙망으로 좌절로 마치는 법이 없어요. 왜 그렇게 소망이 있는 것일까요?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그 믿음의 근거는 지나온 날들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가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시편기자는 압니다. 경험으로 알았어요. 지나온 나의 삶속에 위기가 오고 아픔이 찾아왔을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금 회복시켜주셨는지를 알아요. 경험으로 알아요. 그러니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바위시오, 방패시오,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18편)
이와 같은 고백, 이와 같은 찬송이 저절로 나오겠습니까? 머리를 쥐어짜낸들 나오겠습니까? 다윗이 부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들입니다. “목자, 반석, 요새, 바위, 방패, 뿔, 산성.....” 이 이름들이 어떤 시인들이 사색하고 또 묵상하여 만들어 낸 고상한 이름들이 아님을 압니다. 생명이 오고가는 전쟁터에서나 쓰는 용어 아니겠습니까? 요새, 방패, 뿔, 산성, 바위....,
자신의 경험,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생명이 오고가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그러니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여호와는 나의 방패, 산성, 요새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호와의 이름을 어떻게 부릅니까? 그 이름을 다윗처럼, 전쟁터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경험으로, 체험으로, 그 이름을 부르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있으시겠죠. 당연히 있으시죠.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대로, 나의 구원자, 나의 인도자, 복 주시는 하나님....., 성경에 있는 이름을 주로 Copy 하시는 모습이었을 거에요. 괜챦습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 “그래! 정말 나의 구원자가 되시지~!” 하고 터져 나오면 Copy를 해도 괜챦습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예기치 않은 일들로......, 공산당이 공작금 달라고 학교로 찾아오고 안 주면, 정부에 제가 하는 신학교 사역 고발하고, 자녀들 납치를 운운하고, 그런가 하면 국무총리실에서 리빙스톤 학교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조사하러 나오고, 도망을 다니고, 숨어지내고, 그때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지혜를 주셔서 상황 상황들을 비껴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저는 그냥 자동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주는 나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You are my Wisdom Giver~!) 그래서 사역이 멈추지 않고, 또한 추방당하지 않고 사역을 이루어 갈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세파로 인해 지치고 마음 상할 때에 시편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에 또한 시편을 깊히 묵상하시면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성정을 입은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신앙을 고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50편 중에 다윗이 73편을, 아삽이 12편을, 고라의 자손이 11편을, 솔로몬이 2편을, 모세는 1편을, 에스라인 헤만은 1편을, 에스라인 에단은 1편을 썼습니다. 어떤 시는 눈물이 배어있고, 어떤 시는 환희와 기쁨이 배어있고 어떤 시는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와 같은 믿음의 결단이 배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 가슴에 가까지 와 닿습니다. 우리 민족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과거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내일이 보이지 않던 시절에,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인애하며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고, 다시금 내일을 향한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민족이 애송하는 노래와 시들이 있었습니다.
조국광복의 날을 기다렸던 이육사 시인, 이육사는 자신이 일본의 감옥에 갇혔을 때에 죄수 번호였습니다. 그는 ‘청포도’라는 시를 통해 인내 중에 기다림을 노래했습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렇게 시작한 시는 “내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엔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그런가 하면 기독교 청년시인이고 옥에서 요절한 윤동주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유고 시집에서 권력과 압제로 점철된 더러운 일제시대의 상황에서 고고하게 휘둘리지도 않고, 무릎 꿇지도 않는, 하늘을 닮은 자세와 마음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편을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가 큰 위로와 힘을 얻을 것이에요. 시편의 커다란 주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 까요? 시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창조주로 믿고,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기에,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내일부터 시편 1편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시편을 묵상해 가는 동안 여러분의 삶에 충만히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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