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시편10:1-1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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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11.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여호와여, 어찌하여 환란 때에 숨으시나이까?
우리나라 어르신들의 표현 중에 “하늘도 무심하시지~!”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주로,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고, 악이 승리할 때에나, 또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 은총을 입어야 할 상황인데, 그러지 못하고 그 결과가 안 좋았을 때에, 넋두리처럼 힘없이 내뱉는 아픔과 슬픔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보통 “하늘도 무심하시지~!” 다음에 연결해서 하는 말이 “어떻게 이럴 수가~!” 가 따라 붙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이럴수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표현은 없기를 바라지만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지 못할 때에, 이러한 한숨 섞인 표현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악이 기승을 부리고, 선이 압박을 당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하는 것이지요.
시편 10편은 억울한 일을 당한 성도가 하나님께 애원하며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Blue, 남색, 슬픔의 색깔이요, 음조로 표현하자면 어둡고 무거운 G 선의 저음과 단조로 이어지는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저는 네팔에서 16년간 선교사역을 하며 살 때에, 태어날 때부터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나서, 또는 사회 주 종교가 힌두교인데 기독교인이니 무시당하고 차별대우당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운영하니 전학을 오는 학생들을 대할 때가 있는데 대화를 하는 가운데 저들에게서 또는 학부모로부터 들었습니다. 힌두교 중심의 학교에서 애국가 제창을 할 때에 따라 부르지 않는다고 다른 학생들이 보는 자리에서 교사에게 뺨따귀를 맞지를 않나....., 지금은 네팔 정부가 왕정에서 민주국가로 바뀌면서 애국가도 바뀌었습니다만 전에는 네팔이 힌두왕국이었고 애국가의 가사는 왕을 찬미하는 노래였으니, 그리고 사람들은 왕은 비쉬누 신의 현현으로 소개되고 또 믿었으니, 교회 다니는 아이들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찬양한다. 왕으로 신으로 찬미하는 애국가는 따라 부르지 마라” 그랬거든요. 그러니 아이들이 순종하고 안 따라 부르다가 적발당해 그런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자존감이 떨어지게 되니 기를 살려 주고자 기독교 학교인 리빙스톤 학교로 전학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힌두교 문화권에서 며느리가 시집 올 때에 물건을 해 와야 하는데....., 어느 시집에서 며느리가 될 신부에게 요구조건이 신랑 오토바이를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안 형편이 안되니 친정부모가 못 해준 것이지요. 날마다 시어머니가 또 남편도 합세하여 며느리를 구박해요. 그래도 못 마련해주니, 믿지 못할 일이지요. 며느리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여서, 며느리는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났습니다. 그런데 이 며느리는 아기를 임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도와줄 돈이 없이 그 죄 없는 딸을 바라보는 친정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또 본인은 얼마나 속이 찢어졌을까! 생각하니 저는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한 자가 악인이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악인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지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권력을 가진 자 중에 많습니다. 권력남용이지요. 그 권력을 누리고 또한 유지하기 위하여, 약한 자들을 억누릅니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착취하고, 자신에게 유익한대로 써 먹는 도구처럼 여깁니다.
이 비열한 모습을 시편기자는 날카로운 관찰을 통해 주욱 열거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10절까지가 다 악한 자의 못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5절과 6절, 7절에 말씀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5.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시편 기자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그리고 하소연합니다. “하나님이여, 살아 계시다면 왜 침묵하십니까?” 심판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요. 바로 뭔가가 되기를 바라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이 사이에 마귀는 대놓고 당하는 자의 마음을 휘저어 놓습니다. “이 바보야, 하나님을 기다려봐야 소용이 없어. 시간낭비야. 더 늦기 전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라. 믿고 기다려봐야 소용없어.”
11절 내용이 그것입니다. 또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이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기도인 것입니다. 왜 기도겠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 인류역사의 주관자, 개개인의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분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쉬울 것 같습니까? 쉽지 않아요. 이 일도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믿음 생활이 거기서 거기다 환란이 닥쳐와 봐야 믿음의 깊이가 드러난다.” 갑작스러운 일들, 육신의 질병, 사고, 재정적인 압박, 억울한 일, Beyond my control!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때에, 자포자기 해 버리는 사람들 있습니다.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 생각하니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가족에게 영원한 아픔을 남기고 세상 떠납니다. 그런가하면 범죄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에게 이 모습은 아닙니다. 옳지 않아요. 믿음의 사람이라면 여전히 붙들어야 할 줄이 있으니, 잡아야 할 튼튼한 동아 밧줄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인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절).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무신론자들과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 여기고 그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14절에 보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숨어계시지도 않습니다.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는 거에요.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은밀하게 행하는 죄를 다 보고 계십니다. 심판하실 그때를, 그 시간을 하나님은 계산하고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심판하시고, 단체적으로도 철퇴를 가하시며, 국가적으로도 전쟁과 재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저는 요즈음 중국의 홍콩 사태를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정부는 기독교교회가 성장해가니 다시금 압박을 가하면서 큰 교회들을 의도적으로 압박을 가하면서 분리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상해의 한 큰 교회를 열 개로 분리시켰습니다. 함께 모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정부적으로 파워집단을 형성할까봐 그것을 방지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외국인들이 모여 예배하는 예배당도 그 규모를 압력을 가하여 억지로 줄이게 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저는 점점 더 그 세력이 강해져 가는 홍콩시민들의 데모가 이 일과 무관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제는 공항이 폐쇄되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장갑차를 홍콩으로 이동시키며 홍콩시민들에게 겁박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인권 운운하니 중국정부가 뿔이 났습니다. “참견하지 마라” 하는 것이지요. 결과가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이미 국제사회에서 중국정부는 그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숨어계신 분이 아니시고,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셔서 사람의 타임이 아닌 그분의 시간으로 움직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오늘 이 시편기자는 가장 옳은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17절과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7.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이 기도의 모습을 보면 간청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의 확신과 믿음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과연 그렇게 이루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다윗입니다. 사울왕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던 중에 그 10년이란 세월이 짧지 않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사울을 죽이고자 하였다면 벌써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볼일을 보러 동굴 안에 들어왔을 때에도 그의 뒤편으로 다가가 그의 옷을 베었으며 다윗을 잡으려고 진을 치고 있을 때에 그 진지 안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그를 죽이지 않고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을 가져옵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를 죽여, 그의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주께서 기름부어 세운 왕을 내 손으로 죽였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피하고 도망을 다니면서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침내 사울 왕과 가족까지도 전쟁터에서 생명을 거두시고, 오늘 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소연하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히시고 성군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 맡기십시오. 억울함도 원통함도 분함도 하나님 손에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계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한 자를 세우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시편 9편과 10편을 통해 주시는 이 교훈이 오늘 고통과 억울함 중에도 기도하시며 인내하시는 성도들에게 소망이 되시고 또한 응답으로 나타나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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