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시편13:1-6 개역개정
-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지치면 기도하고 찬송하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시시겠나이까?” 시편 1절에 시편기자의 깊은 탄식이 전해져 옵니다. 특별히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 말은 간절한 기다림의 표현이죠.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 표현이 1절과 2절에 4번이나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응답의 그날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중에 이런 하소연을 하나님께 드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 당연히 있었겠지요. 인생여정에 그러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새벽에도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고 인내하며 힘든 때를 가고 있는 성도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 감옥에서 나갈 날이 언제입니까?” 무고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자는 하루, 하루 밤이 긴긴 밤일 것입니다. 오늘 시편 3편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광야의 도망자로써 인생의 곤고한 날들을 보낼 때에 외쳤던 탄원입니다.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친구도, 가족들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오랜 시간 인내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긴 시간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소송에 휩싸여 있을 때에 힘들고 답답할 것입니다. 결혼을 했으나 자녀가 없어요. “여호와여 언제 생명을 주시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몸 안에 있는 어떤 종양으로 인해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때도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지켜보자” 수술할 상태도 아니고, 또 어떤 경우는 수술하기에는 그 자리가 위험하니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고 두고 “지켜보자”
집을 나간 자녀가 연락을 끊고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니 부모의 마음은 매일 매일이 타 들어갑니다. 우리 교회도 있었쟎아요. 얼마 만에 돌아왔다고 했습니까? 8년 만에 돌아왔다고 했어요. 그런가하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 상황이 비슷합니다.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12년 만에 깨어난 경우도 있고 무려 27년 만에 깨어난 경우도 있으니,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 날을 기다리나, 그 날들은 또 얼마나 힘든 세월이 되겠습니까?
시편기자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를 잊었습니까? 주의 얼굴을 언제까지 숨시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정말 그러실까요? 그러지는 않으시죠.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이신데, 아니계신 곳이 없으시며, 또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으니 그럴리는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니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그 힘든 상황을 2절에 표현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제가 그저께 잠깐 나누었습니다. 네팔 사역에서 어려웠었던 때, 5억 8천만원을 드려 3천평의 부지를 구입할 때에, 20필지의 땅이고 주인이 20명이니 하나, 하나, 사 나간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117번 땅 크기도 제일 커요. 계약하고 돈을 주고 사고 보니 그 땅은 나라가 마을에게 힌두교 종교부지로 준 땅이라고 했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그 땅은 이쪽 편과 저쪽 편을 잇는 중간에 있는 땅이니, 포기하면 땅이 나뉘어져요. 별 생각이 다 들고 육교처럼 다리를 놓으면 어떨까 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머리의 지능을 다 동원해도 방법이 없어요. 미국에서 공부하며 석사과정, 박사과정 그 어려운 논문은, 주어진 문제를 연구하고, 머리를 쓰고, 다른 사람의 연구를 추적 비교하고, 지도교수의 조언을 듣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문제 해결의 길이 보여요. 그래서 한 장이 나가고 또 한 장 나가고....., 그래서 결국 완성하게 되요. 물론 그 과정도 그야말로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지만....., 그런데 이 땅 문제는 해결이 안 되는 거에요. 누구말대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에요.”
부지를 저 만치 볼 수 있는 곳에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었어요. 제법 큰 나무입니다. 그 나무를 저는 기도나무라고 명명하였어요. 외국인이 그 땅 근처에 가까이 왔다 갔다 하면 땅값이 오른대요. 그러니 그 중개사는 그 땅 근처에 제 출현자체를 하지 못하게 해요. 그 말도 일리가 있지요. 그러니 저는 그 나무 아래에 앉아서 저 멀리 그 살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찾아가서 그 나무 그늘 아래에 혼자 앉아서 기도하는 거에요. “주여, 해결해 주세요. 낭패당하지 않도록, 완결되어질 수 있도록 상황, 환경, 여건, 조건, 주께서 주장해 주세요. 이 일은 저의 능력 그 이상의 것이니 오직 주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친히 간섭해 주세요.”
제 믿음이 연약해서 일까요?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생전에 없었던 이명현상이었어요. 귀에서 소리가 나요. 그리고 어느 날 부터 몸에 중심이 잡히지 않고, 일터에서 집으로 와서,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어요.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마음 따로 몸 따로, 가위 눌렸을 때처럼, 내 몸을 내 맘대로 쓰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허우적 거리며 옆에 펜스를 잡고 겨우 일어나서 집으로 들어가 혼자 침대에 누웠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면 돼요? 어떻게 하면 되요? 제 몸은 또 왜 이래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 말만 넋두리처럼 반복하는 거에요. 병원에 가지도 않았어요. 그냥 주님 앞에 울기만 했어요.
오늘 다윗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3절 말씀 읽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시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심한 고뇌와 고민은 육신에 병을 가져옵니다. 몸이 발란스를 잊어버립니다. 다윗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니 눈을 밝혀 달라고 주님께 애원합니다. 그 공포는 겪어 본 자만이 알겠지요. 그러니 저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무슨 뜻입니까? “이러다가 죽을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의 평강은 육신의 건강을 가져오지만, 근심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육신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 근심 염려 걱정, 이거 다 이겨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면 주저앉는 거에요. 그러니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 된다는 말도 맞는 말이구요.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에서 생기는 근심 걱정을 잡아낼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인생의 장애물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울왕과 그의 군사들이었습니다. 도망자로 살게 되니 마음에 안정이 없어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다윗의 모습이 우리에게 큰 영적교훈이 됩니다.
첫째로, 기도합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나의 눈을 밝히소서” “누가 뭐래도 문제의 해결은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있다. 그러니 나는 주께 나아가 기도한다” 입니다. 이 모습이 다윗의 최고의 강점입니다.
둘째,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입니다.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성도 여러분, 소망은 이 광야같은 세상, 인생여정에서 수도 없이 장애물에 부딪힐 때마다 꼭 농치지 말고 잡고 가야할 영성, 바로 소망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입니다.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소망의 끈을 놓치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어려운 때를 지날 때에 제가 쓴 글이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지만 저도 제 마음을 글로 표현합니다. 내용이 이러합니다. 나중에 이 글의 제목을 ‘엘피스’ 라고 지었어요. ‘소망’이란 뜻입니다.
그날을 기다림이 내가 오늘을 사는 이유입니다.
새날을 알리는 선명한 닭 울음소리에
세상은 기지개를 펴고 동녘의 해는 힘차게 떠오릅니다.
새들은 둥지를 박차고 하늘에 날아오르고
영롱한 이슬방울 꽃잎들을 씻어주는 아침이 되면
내 마음은 밀물처럼 꿈으로 차오릅니다.
또 다시 시작된 하루,
해야 할 일들, 주어진 일들, 만나는 사람들,
꼬여진 실타래 푸르기 위해, 웃다가, 울다가, 지쳐가는데
무심한 햇님은 빨리도 지나갑니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따스한 흙속에서
잠잠히 숨을 쉬며 새싹으로 터져나올 그날
힘찬 줄기로 파란 잎사귀로 잔잔한 미풍에 몸을 흔들어
꽃봉오리 만개하는 가을 한날을
온몸으로 기다리는 씨앗과도 같이
나는 오늘도 그 날을 꿈꾸며 바쁜 한날을 살아갑니다.
하루를 마치는 저녁이 되면
숨가쁘게 달려온 한 날의 종착역에서
고운 빛깔로 그려놓은 서편 하늘의 수채화를 바라보며
땀에 젖은 수건을 내려놓는 저녁때에도
나는 그 꿈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안식을 위한 어두움이 이웃처럼 창가에 찾아들고
밤하늘엔 보석처럼 영롱한 별빛, 파스텔화 은은한 달빛
온 세상은 고된 몸을 은하수에 담그고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 고요한 밤에도
나는 또 다시 그 날을 꿈꾸며 잠을 잡니다.
그 날을 기다림이 내가 오늘을 사는 이유입니다.
김연정 2014. 1. 23.
성도 여러분, 누구나에게 염원이 있습니다. 그 염원은 기도 속에 눈물로 녹아집니다. 눈이 뜨는 이른 아침에도, 정신없이 바쁜 한낮에도, 그리고 안식으로 찾아오는 저녁에도, 그리고 잠든 꿈속에서도....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가도, 꿈이 이루어지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는 그 소망으로 인해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힘차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다윗에게서 배우는 영적 교훈은, 찬송하는 것입니다. 힘들면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하고, 지치면 마음으로라도 되내이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말씀에 보니 “여호와의 은덕”입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니, 인생의 고비마다 주의 손길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고, 나를 절망의 늪에서 건져주셨고, 칠흙 같은 밤에도 빛으로 비춰주셨으니......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 저의 어머니가 힘들고 지칠 때에 찬송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났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찬송을 부르시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었습니다. “마음이 어렵고 힘들 때에는 찬송을 부르는 거구나~! 그래서 다시금 힘을 얻는 거구나!” 그래서 저도 힘들고 어려우면 찬송합니다. 그러면 힘이 납니다. 아예 노래를 만들어 부릅니다. 지난번 심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만든 찬송이 지난번 전교인 수련회에 주제가로 부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찬송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네/ 푸른초장에 날 뉘시며 물가로 인도하시네/ 내 영혼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네/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나를 승리하게 하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께서 함께 하시니/ 해를 두려워하지 않네/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도......./
첫째, 기도, 둘째, 소망, 셋째, 찬송! 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모습으로 인생의 장매물, 어두운 밤의 때를 이겨나가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