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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40] 양보와 인내로 승리한 이삭
운영자 2024-06-07 추천 1 댓글 0 조회 243
[성경본문] 창세기26:12-22 개역개정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양보와 인내로 승리한 이삭

 

성경의 지리적 배경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은 사막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비가 자주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고 물이 귀해요. 더욱이 유목민으로써 소와 양과 염소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물 확보 문제가 언제고 최우선적으로 해결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물이 풍부한 우물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살았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여러 번 파야만 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요. 이삭이 농사가 100배나 결실을 얻고 잘되고 흥왕하고 강성해 가자 이웃으로 살아가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과 그의 식솔, 가축을 치는 일꾼들이 그들의 땅에서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26:16)

 

이삭이 그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이삭이 사용하던 우물을 덮어 버립니다. 우물이 없으면 사람이나 가축이나 그곳에 살 수 없어요. 그러니 떠나야만 합니다.

 

이 상황에서 이삭을 보십시오. 대항하지 아니해요. 그곳을 떠납니다. 그래서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부친 아브라함이 팠었던 우물, 그러나 덮여 있었던 우물들을 다시 파게 되었어요. 아브라함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이 다 덮어 버린 것이에요. 이삭이 다시 열심히 파서 샘의 근원을 얻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그 그랄 골짜기에 살고 있었던 블레셋 족속의 목자들이 또 다시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며 그 우물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물 파기가 쉽습니까? 결코 쉽지 않아요. 샘이 어디에 있는지 측정하기도 어렵고, 기계가 없는 그 시대에 다 손으로 깊이 파고 내려가야만 지하수를 얻을 수가 있었어요.

 

이때 이삭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삭은 또 그 우물을 양보하고 다른 곳에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또 그 우물을 놓고 목자들이 다툽니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26:21)

 

이 상황에서 이삭은 또 양보하고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 우물을 파고 물을 얻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다툼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고백합니다. 2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6:22)

 

이삭의 이와 같은 성품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보하고 또 양보합니다. 왜 그렇겠어요? 다투고 싸움하고 전쟁하기 싫으니까, 평화를 유지하기 원해요. 오늘날 우리 시대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삭의 모습은 결코 유능한 모습이 아닐 수 있어요. 바보같이 늘 당하고만 살다니...!! 내 자녀가 그런 모습이라면 여러분은 또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너는 왜 그래? 왜 멍청하게 당하고만 사니? 너도 네 것을 주장하라고~!”

이 이삭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에요. 힘이 없으니 그렇게 당하지!” “자신의 땅도 아니지! 아마도 거느리는 이삭의 일꾼의 숫자가 그들 블레셋 사람들보다 적으니까 피한 거겠지! 그러니 힘이 없어서 진거야!” 이 시대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그럴듯한 해석이죠?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힘이 없는 자가 아니었어요. 주변의 그 누구보다 더 강성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어요. 16절에 말씀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26:16) 그 전 절 13절과 14절에 그 강성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26:13~14)

 

그러면 전쟁을 하기로 하면 전쟁에서 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양보를 해요.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의 성품 때문입니다. 낙관적인 성품이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삭이란 이름의 뜻이 웃음 이에요. 또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지요? 아버지의 양보심 많은 좋은 성품을 이어받았어요. 그의 부친 아브라함, 그는 땅을 나눔에 있어서 조카인 롯에게 양보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래서 롯은 물이 많은 땅으로 차지했고 아브라함은 그 보다 못한 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어떻게 그러한 양보심 많은 온유한 성품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어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축복자가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말로 믿는 데가 있었던 거에요. 오직 하나님! 하나님만이 축복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으므로 그리고 그 복이 있는 삶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어요. 오늘 성경본문, 12절에도 나타나요. 이삭이 경험합니다. 보통 소출은 뿌려진 씨앗의 30배에서 아주 많으면 70배 정도의 수확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은 얼마나 수확합니까?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 주시므로 아멘~! 그래서 창대하고 왕성하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음을 이삭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복 주신다!” 그것을 믿는 거에요.

 

물론 내 수고도 있어요. 애쓰고 땀을 흘리고 수고해요. 그러나 땀 흘리고 수고한다고 해서 다 만사가 형통하고 창대케 되고 성공하는가? 그렇지 않아요. 내 능력 밖의 것들이 작용을 해요. 하나님께서 상황, 환경, 여건, 날씨, 전혀 모르던 사람과의 만남과 연결, 그렇죠?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서 일이 성사가 될 줄 어떻게 사람이 아느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에요. 거기에다 건강, 지혜, 재능 등등 이 모든 것을 주관하셔야 복이 임합니다. 내가 꿈도 못꾸고, 상상치도 못한, 예견할 수 없는, 큰 복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비로소 가능한 줄로 아셔야 합니다.

 

이삭은 경험했어요. 그래서 알아요. ~!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적이 나타나는구나! 100배를 거두게 하시는구나!” 그러므로 양보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 지지고 볶고 다투고 얼굴 붉히고 마음 상할 이유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 양보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품이요, 그러한 온유한 성품은 이미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요, 복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게 있고, 양보할 수 없는게 있습니다. 진리는 양보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생명을 걸어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당하기도 했어요. 그래야 진리가 보존되고 교회는 성결함을 유지합니다. 진리를 사수해야 교회에는 의가 이루어지고 그 모습으로 인해 이웃과 사회가 변화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의 상황처럼 물질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고 더욱이 가깝게 함께 살아가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부딪히고 의가 상하고 결국 단절하고 멀어지고.....,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인해 관계 깨지면, 무엇보다 내 마음 상하는 것드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복음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왜 양보하는가? 하나님의 손길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 그 상황 다 보시고 아시고, 더 큰 복으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필리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와 아내가 섬기던 까왁교회 성도들은 화산 이재민들로써 피나투보 산속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다 화산재로 덮여 버렸어요. 그러니 생계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저는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당장 먹을 것이 없었어요. 생존의 문제가 너무 컸어요.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복음을 외치는데 정작 교우들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요.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울다가 지치고 아프고 병들었어요. 선교사의 고뇌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집과 까왁마을로 가는 길 가에 넓은 초지가 있는데 놀고 있어요. 1헥타르 정도가 되니 꽤 크지요. 3천평 정도 되요. “개간해서 논으로 만들자주께서 주신 아이디어에요. 그래서 교우들과 더불어 협동농장을 만들자.

 

땅 주인이 있었어요. 조건은 우리가 논으로 개간하는데 그러니 3년은 그냥 쓴다. 그리고 3년이 지나면 소출의 얼마를 주고 계속 사용한다저의 고향 교회에 말씀드렸더니 경운기 살값을 보내주셔서 교회 형제들과 그 화산재 덮인 초지를 논으로 열심히 잘 개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모내기도 했습니다. 첫해 수확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 쌀가마니들을 교회 강단에 올려놓고 추수감사예배도 드렸어요. 감동이었죠. 함께 그 농사한 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두 해가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수확을 기대할 정도로 논같은 논으로 만들어 졌을 때에 주인이 계약 파기를 했어요. 그 땅을 사용하지 말라는 거에요. 억울하죠? 정말 억울하죠. 이삭이 겨우 우물을 파 놓았더니 떠나라는 것과 다를 바가없어요. 아니 더 큰 손실이죠.

그런데 이 아이타 산지족은 무능해요. 법적 대응도 몰라요. 저는 기도했어요. 어떻게 할 것인가? 결론은 그 주인에게 그냥 돌려주는 것이었어요. 소문이 났어요. 못된 그 땅 주인! 그냥 당한 까왁교회 교인들과 선교사는 불쌍해요.

 

그 주인이 의기양양해서 그 만들어진 논에 벼를 심었어요.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푸르게 자라나는 벼를 바라보면서 제 맘이 편할 리가 없지요. “주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해에 우기철이 다가오고 26년만에 최고의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산위에 쌓여 있었던 화산재가 계곡을 타고 물과 함께 쓸려내려 오면서 그 논의 벼들은 다 망가졌어요. 뿐만 아니라 화산재와 흙과 돌로 더 높이 더 깊이, 완전히 덮여 버리게 되어 복구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다 보면서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까왁교회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얘기했어요. 하나님은 살아계셔~! 그러니 저렇게 못된 사람은 벌을 받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 만으로도 까왁교회의 교우들의 어린 믿음은 더욱 더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을 위로하시려고 교회 주변의 15백평에 심은 망고나무들이 열매를 맺어가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제 거꾸로 그처럼 이삭을 힘들게 하고 떠나게 했던 블레셋의 아비멜렉이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이삭을 찾아옵니다. 이삭에게 찾아와서 화해를 요청합니다. 이삭이 의아해 합니다. 떠나라 할때는 언제고 또 찾아와 이제는 싸움하지 말자고 하니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들이 그렇게 찾아와서 화해를 요청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무엇입니까?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26:28)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삭의 삶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축복, 저들은 그것을 본 것이었어요. 그러니 이렇게 와서 자신들이 잘못을 고백하고, 거꾸로 자신들이 당할까 봐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이삭을 찾아와서 화해를 요청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이 그러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의 하나님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로 인하여 다투지 않고 양보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더딜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축복이 역사가 여러분의 축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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