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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강해 19] 심판을 늦추시며 관찰하시는 하나님
운영자 2025-07-24 추천 0 댓글 0 조회 25
[성경본문] 역대하19:1-7 개역개정

1.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니라

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3.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4.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

5. 또 유다 온 나라의 견고한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읍마다 있게 하고

6.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심판을 늦추시며 관찰하시는 하나님

 

북왕국과 동맹을 맺고 아합왕과 사돈지간이 된 남왕국의 여호사밧 왕은 오늘날 말로 속 좋은 사람! 마음이 넓고, 정이 많고, 착하고, 순진한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 미가야가 그렇게 감옥에 갇히면서도, 하나님은 이번 전쟁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지만 우유부단하게 아합왕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 결과로 아합왕은 전사하게 되었고, 본인은 적군의 추격으로부터 탈출하여 가까스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큰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훈이겠어요?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을 할 때는 동조하거나 합세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게 되고,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선지자 예후가 여호사밧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아합왕의 청을 따른 그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며 그러면 안됩니다.” 아주 엄중한 말로 조언합니다. 2절 말씀이에요.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어요.

 

그때 왕이 선지자의 책망에 수긍을 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서였을까요? 선지가 예후는 이어지는 말로 왕을 격려하기도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대하19: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로 진노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그래도 과거에 하나님 보시에 여호사밧이 의롭고 선한 일을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시겠다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요.

 

이에 대한 답은 이렇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제목이기도 합니다. ‘심판을 늦추시며 관찰하시는 하나님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이는 마치 은행에 신용등급이 높은 것과 같은 것이에요. 평소에 은행에 진 빚도 여러 번 있지만, 그러나 약속한 날짜에 또박또박 잘 갚아서, 신용등급 점수가 높은 자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러므로 빚을 갚지 못해도 바로 차압이 들어오지 않고 기다려 줍니다. 무슨 말이겠어요? 여호사밧의 전쟁에 참여한 모습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진노하실만한 일이었으나, 여러 번 잘하다가 한 번의 실수와 같은 잘못이었으니, 하나님께서 심판을 늦추시며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겠습니까? 평소에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해요. 있어야 할 자리!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에 빠지지 않으면서,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그리스도의 대사의 모습을 유지하며 흔들림이 없었는데,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증되고 견뎌내지를 못하니, 일탈을 합니다. 정도가 있는데 지름길을 택하고, 실력으로 이루어야 할 일을 쉽게 하고자 뒷거래를 한다든지...., 자신이 보아도 이건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행하므로, 무너지고, 탈선하고,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일이 꼬이고, 낭패를 경험하며,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가 미쳤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후회하고,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우울감에 휩싸일 때, 가장 힘든 부분이 뭐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 모습을 처음부터 다 보고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에 참석했더니 강단에서 설교의 말씀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못나고 추한 마음을 제대로 콕 집어 내는지...,! 화들짝 놀라고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선지자 예후 앞에 선 여호사밧 왕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이게 하나님의 음성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여러 달이 가도, 어떤 무서운 심판, 진노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기울던 사업도 회복이 되고, 그르친 사건도 수습이 되고, 다시금 원상태로 안정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 정말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왜 안 치시지? 왜 따끔한 매를 안드시지?” 여러분은 그런 적 있어요?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으실까요? 왜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지 않으실까요? 그 답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어요. 심판을 늦추시며 관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깨달았느냐? 정말 후회하고 회개하고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느냐? 그렇게 행하고 있는지 내가 두고 보리라!”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예후가 예언한 하나님의 진노는 여호사밧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여호사밧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권세를 행사하되,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로, 그 마음과 자세로 똑 바로 섰기 때문이에요. 4절 이하 마지막 절, 11절까지의 내용들이 다 바로 그것입니다.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여호사밧은 이제 철저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의 나라와 백성을 하나님 앞에서 견고히 세워가는 일에 충성합니다. 4절 내용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대하19:4)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 라고 했어요. 유다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라는 뜻입니다. 우리 표현으로 하면 삼천리 반도 방방곡곡에 두루 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치며 가르치며 손수 뛰어다니는 모습이에요. 이게 쉬운 일입니까? 선지자는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왕의 신분으로 이렇게 행하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첫째, 내가 하나님께 잘못하여 벌어놓은 그 진노를 푸시도록 내가 충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둘째, 신실한 자세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가 명하신 것을 당연히 행해야지! 이 길이 살길이다. 내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이다.

 

6절은 뭐라고 합니까?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대하19:6) 재판할 때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살펴라! 그렇습니다.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종교가 타락하고, 재판이 돈에 무너지며, 그 결과로 사람들의 삶에 도덕이 무너질 때입니다.

 

9절에 여호사밧이 뭐라고 명합니까?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라(대하19:9) 정말 아멘 아닙니까? 마지막 절 11절 마지막 문장이 이러합니다.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하니라(대하19:11)

이렇듯 여호사밧이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와 선과 의를 행하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진노를 발하시고 여호사밧을 심판하시나요? 하시지 아니하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습을 통해 말씀의 제목대로 심판을 늦추시며 관찰하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관찰하실 때, 완전히 돌아서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요, 준비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그 명을 다하여 세상 떠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그에게 징계와 심판은 임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이 그래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요. 많은 스트레스와 과중한 업무 또는 세상의 대세에 한눈을 팔 수 있어요. 시험에 들 수 있어요. 그러나 기도하면 그 마음에 찔림이 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양심의 가책이 일어납니다. 날 사랑하시는 성령께서 경종의 비상벨을 울리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이와 같은 모습을 사랑하시니, 본래 태어나기를 성품이 유하고 부드러워 남의 부탁에 귀가 얇은 그를 어떻게 조절하시고 다루시며 인도하시는가?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2035절 이하 37절까지 찾아가서 보겠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였더라 두 왕이 서로 연합하고 배를 만들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었더니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 왕이 지은 것들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들이 부서져서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대하20:35~37)

 

여호사밧은 또 다시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어요. 참 못말리죠? 함께 배를 만들어요. 전함을 만드는 거예요. 다시스를 침공하려고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데 이제는 아예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립니다. 그래서 전쟁도 못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여호사밧에게 손해입니까? 이득입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막대한 손해요 손실이 틀림없어요. 그러나 여호사밧을 사랑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럴 때 있지 않나요? “왜 이런 손실이! 왜 이런 사고가! 왜 이런 낭패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알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한 개입이요, 방편이신 것을!

 

이 새벽에 기도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죄를 범했을 때,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면, 준비한 진노와 심판을 늦추시며 관찰하시는,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앞에서 똑 바로 행하게 하소서! 다시금 첫사랑을 회복하게 하소서! 정도를 걷게 하시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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