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출애굽기6:2-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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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령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왜 실패하게 하시고 또 반복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의 응답은 더디 오는가?” 라는 질문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늘 발생하는 질문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 질문을 해 보았을 것이에요. “왜 하나님의 응답은 더디 오는가?” 그냥 빨리, 쉽게, 응답을 해 주시면 내 인생이 편하겠는데....,,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노예 해방의 기수로 세울 링컨을 미국의 대통령으로 바로 세우셨으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스무 번이나 되는 많은 낙선과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하셨는지....? 문둥병이 걸린 나아만 장군을 고쳐주실 거면 바로 고쳐주시지 왜 요단강에 가서,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일곱 번이나 같은 모습으로, 몸을 담게 하셨는지....?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라고 명하셨으면 바로 잘 가게 하시지 바람이 불어 밤새도록 못 나가게 하시고, 또 도와주실 거면 바로 와서 도와주시지, 밤 사경에나 오셔서 파도를 꾸짖으시고 잠잠케 하시고 건너가게 하셨는지....?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빠가 죽어가니까 그렇게 애타게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바랬는데 왜 예수님은 소식을 듣고서도 곧 바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일부러 늦게 오셔서 나자로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두셨는지...?
“왜 하나님의 응답은 더디 오는 것인지?” 이 새벽에도 잠에서 깨어 일어나 찬바람을 맞으며 교회에 올라 오실 때에 그리고 또 기도를 이어가실 때에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내 아들이, 내 남편이 믿음으로 돌아오게 하실 거면 빨리 돌아오게 하시지 왜 이렇게 긴 시간 기도를 시키실까...?” “취업을 하게 하실 거면...., 결혼을 하게 하실 거면..., 남,북간에 통일을 하게 하실 거면...., 빨리 해 주시면 참 좋을 텐데 왜, 왜, 왜.....? 하나님의 응답은 더디 오는 것인지?”
오늘 성경본문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모세를 광야에서 40년간이나 기다리게 하시고 훈련을 시키시고 시내산에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으면, 이제 일을 이루게 하셔야지 왜? 가라고 하셔서 순종하고 바로왕에게 가서, 출애굽을 요청하라고 해서 그렇게 순종하며 했으면, 바로왕의 마음을 돌리셔서 듣고 그래 떠나라 하게 해주셔야지....., 또 다시 듣지 않게 하시고 아니 오히려 강퍅하게 하시고,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하시고,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인지? 모세가 너무 힘이 듭니다.
저는 “도대체 왜?”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만 모세는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장 22절에 보십시오.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그 이유를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 속에서 찾게 됩니다. 평생 마음에 담고 가야할 귀중한 영적교훈이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6장 9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순종하였습니다. 가서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왕도 듣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노역이 더 심해지니 마음 상하여 오히려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될 것이라고 반복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수께끼 같습니다. 왜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이 일이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그냥 한 번에 쉽게 일이 이루어지면 “와~! 별것 아니네” 또는 “역시 모세가 대단해~!” 아니면 “바로가 마음이 어질어서 바로 보내주었어!” 그러면 누가 가리워집니까? 하나님이 가리워집니다. 사람이 올라가고 사람이 영광을 받게 되고, 모세가 영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이 가리워집니다.
성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무리 사람이 큰일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지도자가 사람들 앞에 우상화 되거나 신격화 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언제고 중요합니다. “주께서 하셨구나!” “주님께서 하셨어!” “좋으신 하나님~!”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이 잘 안된다고 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넙죽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여! 이제 주께서 일하실 때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로만 일어나게 하옵소서!”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격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응답이 더디 올 수 있습니다. 본문 6장 2절과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에게 하나님은 ‘엘 샤다이’ 라고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에게는 그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여호와,’ 또 다른 발음으로는 ‘야훼’ 그 뜻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존재하시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이제 ‘여호와,’ 즉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시는 분으로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그의 인격성을 보여주시는 것인데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하신 약속을 반드시 오늘, 그리고 내일,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6장 4절과 5절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기억하신다” 라는 말씀은 언약, 즉 약속을 기억하시고, 또한 그러시기에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어요. 횃불언약 기억하시지요? 그날 밤 아브라함이 제물을 준비해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있던 저녁에 깜깜해 지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4장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14:13-16).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약속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더디 오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중에 또는 듣는 중에, 내 가슴에 주신 언약, 비록 반복되어 지는 실패와 아픔이 있더라도 이루어지는 그 날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으로 보여주실 것입니다.
셋째, 왜 응답이 더디 오는가? 그 답은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믿음도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해서 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6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한글 개역판은 “강한 손을 더하므로, 더하므로”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요. 뭐냐하면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어에는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 문장에도 그렇습니다.
제가 한국에 들어와서 목회사역을 하는 중에 남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여러 번 들었어요.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 ‘리버리’ 하다고 했는데요. 앞에 ‘어’ 자 붙이시면 그 뜻을 알아요. ‘어리버리’ 그도 그럴 것이 24년이나 외국 언어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영어도 그렇고 따갈록어도 네팔어도 이 주어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은 주어 생략해도 통해요. 서로들 잘 통합니다. 제가 옆에서 보면 신기하게 주어 없이도 얘기가 잘 통해요. 아직도 저는 누가 주어 없이 저에게 말씀하시면 지금 누구를 얘기하고 있는 건가? 헤맵니다. 익숙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누구의 강한 손입니까? 영어 성경은 확실히 보여줍니다. “I will do to Pharaoh: because of my mighty hand" "내가 행하리라 바로에게 나의 강한 손으로,”그런 뜻입니다. 이 모든 일에 “I will” “내가 한다,” 여호와께서 하신다 라는 말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만 여덟 번이 나와요. “I will do, I will bring you out, I will free you, I will redeem you, I will take you....,”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
그러니 이러한 같은 일의 반복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인데....응답이 더디오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응답이 더디 오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될까? 안될까? 포기해? 계속해?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동안........“그래, 믿음으로 나아가자!” 라고 선언하고 나갈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더 하나님의 손을 잡고 더 기도하고 더 수고하며 더 소망의 날을 바라보며 불을 지펴갑니다. 이 상황이 그의 믿음에 더 큰 증폭을 가져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모세가 단 한번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의 믿음이 더 자랐겠습니까? 그런데 그러지 아니하고 바로왕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거절하고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므로 승낙했다가 또 거절하고 열 번을 반복하는 사이에 살아계신 주님의 권능의 손길을 더욱 더 많이 체험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애굽 사람이 믿고 따르던 신과도 같은 나일강이 저들에게 재앙을 줍니다. 개구리와 이와 파리와 악질과 독종과 우박과 메뚜기와 흑암과 피와 그리고 애굽의 신인 바로왕의 장자의 죽음....,
그러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시간이 더디 걸리는 것 같으나 더 강하게 역사하시면서 하나님의 전능함이 들어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계획을 세우고 나에게는 기쁨과 보람이요, 이웃에게는 유익의 증진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자 하여 시도했는데 안됐습니까? 그런데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까? 두 번 시도했는데 안됐습니까?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가 포기입니까?
아니면 더욱 더 주님 의지하고 전진하는 것입니까? “선을 행하다가 포기하지 말지니 때가 되면 거두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의 소유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더 강한 손길, 더 강한 역사를 체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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