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출애굽기20:1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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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의 서론 부분에 대해 은혜를 나눌 때에 십계명은 그 주제에 있어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로 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수직관계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이는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수평관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수평관계의 계명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주고 계신 계명이 곧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인간관계의 으뜸이 뭐냐? 곧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아 문화에서는 ‘孝(효)’ 라 하였습니다. 이 효 사상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효 사상은 아시아에 유교의 사상이 되기 전, 역사적으로 보면 훨씬 이전에 시내산의 십계명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삶의 지침으로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참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과거에 한국에 복음을 들고 들어온 선교사님들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했지만, 이 효사상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 뒷 배경에는 한국 문화 중에 선한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 선교사들의 자신들의 문화와 성경의 문화를 동일시 한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서양문화가 다 성경문화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또는 부모를 알지 못하는 종교로 오인 받게 만들었고 서양의 풍습을 그대로 받아드린 한국교회는 그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지켜오던 한국의 효사상의 전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혹 뒤늦게 오늘날에라도 강단에서 부모공경에 대해 강조하면 “아 그것은 유교사상 아냐?” 하면서 자신이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뉘우치기 보다는 종교적인 핑계를 대곤 합니다.
역사학자인 Arnold Toynbee는 그의 만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국에서 장차 인류문명에 크게 기여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 사상이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아시아는 효사상 때문에 도덕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서양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효사상으로 인해 우월한 동아시아의 덕목을 바르게 평가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은 시대를 초월하여 신약시대에도 가정과 사회를 유지하는 도덕법이 됩니다. 마태복음 19장 19절에 예수님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로,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길로 예수님께서 다시금 강조하세요.
신약성경은 또한 요한1서 4장 20절에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형제’라고 말씀을 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실수로 손자를 이불 밑에 깔아 죽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 실수로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해서 몰래 어린아이를 안고 나와 남편에게 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이 불효 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시게 만들다니!” 하면서 그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그 후 이 일을 임금님이 알고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이름 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부모공경을 강조하기 위하여 지키는 자와 못 지키는 자의 벌과 상급에 대하여 아주 극명하게 대조시켰습니다. 먼저 벌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며(신 27:16), 부모를 조롱하거나 해롭게 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잠 30:17). 가나안의 아비 함은 아버지의 노아의 수치를 가려 주지 않고 흉을 봄으로 그 형제의 종들이 종이 되도록 저주 받았습니다(창 9:20~25).
두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이 십계명은 어느 계명이든지 지키면 복입니다. 그래서 ‘행복지침’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십계명 중 여덟 계명은 “하지 말라”로 끝을 맺습니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그런데 제4계명은 “안식을 지키라” 라고 말씀하셨고 이 5계명에서 또 “공경하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 말라” 하면 그 뉘앙스가 아주 강경한 명령조인데 반해 “해라” 그러면 권면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더욱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계명은 유일하게 바로 이어 상급까지 주신다 약속하시면서 “그러니 잘 들어라” 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효도를 안 하면 하나님께서 이 계명에 경품까지 걸어 놓으셨을까?”
과거에 비해 이 시대는 정말 효도하지 않습니다. 정말 마음 안타깝습니다. 시대적인 풍조라고 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문화라고 해서 대충 넘어갈 것이 아니라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비성경적이란 말은 사단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단이 문화를 이끌고 갑니다. 성경에 분명히 가장 중요한 십계명으로 주셨는데 이 시대의 문화라고 해서 지키지 않는다. 아주 잘못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잘 될 리가 없습니다.
T.V.프로 중에 사회의 모순 된 점들을 고발하는 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의지 할 곳 없는 노인들을 취재한 프로였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노인들이 모두 자식이 없는 “무의탁 노인”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있지만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은 노인들인 것입니다.
취재하는 아나운서가 어느 노인의 자녀들에게 직접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한 자녀와도 연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노인이 말합니다. “요새는 전화번호가 다 찍혀서, 그 애들이 내 전화면 받지도 않아!” 그 노인에게는 자녀가 다섯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취재하는 기자가 말합니다. 만일 그 노인에게 자녀가 한명도 없었다면, 그는 나라에서 “무의탁 노인”들에게 주는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호적에 자녀들이 엄연히 있기 때문에 그 보조금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없는 것 보다 못한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왜 복을 차 버리려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약속을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 20장 1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장수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명기 5장 16절에는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또한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3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제 4계명을 잘 지키면 그 상급으로 복을 누리게 되는데 그 복이란 첫째는 장수요, 둘째는 잘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양가의 부모님을 잘 섬기셔서 이 장수의 복과 잘 되는 형통의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효를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니까요. 그런데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기도 하지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래서 가정의 가장 이상적인 구조는 삼대가 함께 사는 것이라고 교육학자들은 말합니다. 그것도 아시아의 학자가 아닌 서양학자들이 말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섬기는가를 보고 자라면서 나중에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부모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맞지 않겠습니까? 내리사랑으로 자식들만 중요시 여기는 이 시대 가정의 모습은 똑 같이 나중에 자녀들이 부모는 공경하지 않고 자신의 자녀들만 어여삐 여깁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지요. 부로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그것입니다.
제 가정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생활을 하니 고국에 자주 들어오지 못합니다. 딸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고 나니 이제는 혼자도 고국방문을 할 수 있겠다 하여 한국에 혼자 보냈습니다. 잘 도착해서 할머니 집을 찾아가는데 할머니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해나의 모습을 보고 할머니가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제 딸이 키도 작아요. 중학교 1학년 학생인데, “할머니~!” 하고 들어오는데 보니 들기에는 너무 힘에 겨운 커다란 수박을 한통 들고서 들어오는 거예요. 얼마나 무거운지 더운 여름에 얼굴이 벌개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드시라고, 무겁고 큰 수박을 사 가지고 온 거예요. 그 힘든 모습으로 수박을 들고 “할머니 할아버지 드시라고 사왔어요.” 말하는 손녀딸의 모습에 마음이 울컥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는 감동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저희도 나중에 듣게 된 얘기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린 것이 지애비, 지어미 흉내를 그대로 내더구나~!” 저희가 어쩌다 고국에 방문하면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갈 때에 아이들 방학인 여름철에만 들어왔는데요. 그러니 빈손으로 가지 않고 보통 과일을 사가지고 갔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이제는 자기가 대표로 혼자 들어왔는데 할머니 댁에 가야하니 힘들어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잘 지켜 행하시므로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시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녀들 앞에서 말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부모 섬김의 본을 보이셔서 대대손손 복된 가정을 이루어가시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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