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열왕기하4:26-3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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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께서는 왜 기적을 행하시는 가?
하나님은 때때로 기적을 행하십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 그렇게 하십니다. 물론 창조의 법칙이 있어요. 자연의 법칙이지요. 그 창조하신 이치에 따라 온 우주 삼라만상이 움직이고 생명체들도 그 생존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이치와 질서는 그 어느 정밀한 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는 고장이 없이 잘 돌아갑니다. 하루도 해가 뜨지 않는 날이 없고, 뜬 해가 지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계절은 순행합니다. 거꾸로 역행을 하여 겨울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물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지 거꾸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일이 없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요, 이와 같은 창조의 법칙을 발견해내고 삶에 유용하도록 응용하는 것이 과학의 일입니다. 과학은 절대 창조하지 못합니다. 그 부분은 하나님이 영역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때로 필요에 따라 과학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과학이 증명할 수 있는 상식적인 세계를 초월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사람이 이와 같은 기적을 보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신비한 세계는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영역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열왕기하 4장에는 다섯 가지 기적이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첫째 기적은, 선지생도인 남편을 잃은 집안이 가난으로 인해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빚을 빌려준 자가 그 가정의 두 아들을 종으로 삼고자 할 때에, 그 딱한 처지를 안 엘리사가 저들로 빈 그릇을 빌려 오게 하고, 그 빈 그릇들을 기름으로 채우는 기적입니다. 그러니 그 기름을 팔게 하고 빚을 갚게 합니다.
둘째 기적은 오랫동안 자녀가 없는 부부에게 자녀를 갖도록 하는 기적입니다. 그 남편은 이미 늙었다고 했으니 자녀를 가진 것이 기적입니다.
셋째 기적은 죽은 그 아이를 다시금 살려내는 기적입니다.
넷째 기적은 선지생도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중, 들에 있는 호박을 넣었는데, 그것이 독성이 있는 것이어서 먹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한 끼를 굶게 되었어요. 그때에 엘리사가 선지생도들에게 한 가루를 그 음식에 넣게 하니 해독이 되었고, 먹어도 문제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기적은 보리떡 이십개와 약간의 채소를 가지고 배고픈 자 백명을 부족함 없이 먹이고도 또 남게 되는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기적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위기에 처한 인간의 고난을 해결하시기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기적이라 일컫는 일들이 이처럼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기적인가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든 오늘날이든 초자연적인 능력을 구가하는 초능력자들은 인간이 할 수 없어 보이는 일들을 행하며 자신의 인기를 구가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가령 앉은 자세에서 공중으로 뜨든지, 아니면 염력이라 하고 손을 대지 않고 사과를 떠오르게 한다든지, 아니면 손을 대지 않고 숫가락이 휘어지게 한다든지, 아니면 칼 위에서 뛰든지, 아니면 불씨가 남아있는 재 위를 걷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이 세인을 놀라게 하여도 그것이 우리 인생에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인간의 아픔과 고뇌를 해결해 줍니까? 그것이 우리의 도덕성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영성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은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리고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놀래키는 그런 기적은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병자를 고치면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말씀을 듣다가 배가 고파 기진한 자들을 먹이시면서 일어났어요. 예수님의 기적은 캄캄한 한 밤중,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에 휘말려 생명의 위험에 처했을 때에 일어났으며, 예수님의 표적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절망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 믿음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그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적과는 전혀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기적이 오늘날에도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늘 기적만 기대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부분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어느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어느 특별한 종에게는 영적으로 파워풀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능력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실 때에 주셔서 나타내는 것이지, 개인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교만해지기 시작하고, 이단의 괴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쓰임 받는 종은 늘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기적의 상황입니다. 수넴여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 엄마가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갈멜산 선지동산에 있는 엘리사에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정작 엘리사는 그 슬픈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 앞에 무릎을 꿇고 엘리사의 발을 잡고 울며 하소연합니다. 엘리사의 제자가 말립니다. 그때에 엘리사가 내버려 두어라 말씀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왜 이 여인이 슬픈지 알지 못합니다. 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안 알려주시면 엘리사 선지자는 모르는 거에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의 출발도 하나님이 이시요. 이루시는 일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실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 능력 많은 종이기 때문에 일을 이룬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이 이어집니다.
엘리사가 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함께 슬퍼합니다. 그를 살리고자 합니다. 그의 제자인 게하시에게 명합니다. 29절 말씀입니다.
“내 지팡이를 들고 가라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생각이고 방법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죽은 아이가 깨어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당황할 수 있었겠지요. 어떤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신으로 아직 영감을 주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의 능력으로 아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겸손케 하십니다. 이럴 때에 주의 종들은 빨리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종을 계속 들어 쓰실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밖에 없는 주의 종인 것을 이제 우리가 보게 됩니다. 자신이 보낸 지팡이를 얹어도 깨어나지 않게 된 이후 저가 수넴 여인의 집으로 들어가서 침상에 누어있는 아이를 보고 저가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간구하는 엘리사인 것입니다. 자신의 지팡이로 이 아이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상황을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여호와께 긍휼을 간구하는 엘리사 선지자인 것입니다. 3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보낼 때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어 저가 하는 행위는 지팡이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그 아이위에 올립니다.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이 모습은 체휼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몸을 죽은 그 아이의 몸에 얹었다고 하는 것은 곧 그 아이의 죽음과 자신의 생명과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모습은 과거 엘리야 시대에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에 그 과부를 불쌍히 여겨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엘리야 선지가가 행한 행위가 같은 모습입니다. 열왕기상 17장 20절에서 23절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20.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죽은 아이의 몸에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이 모습은 진정한 체휼의 모습으로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생명 거둬 가시고 이 아이를 살려 주소서~!” 진정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엘리사가 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긍휼히 여기셔서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생명을 내어 주신 모습을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생명을 살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경험합니다. 얼마만큼 어려운 자를 위하여 제가 진정으로 체휼하며 기도할 때에 역사가 나타나고, 또 나타나지 않고를 경험을 통해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도를 위해 눈물로 가슴을 찢어가며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들어주십니다.
이 시대, 참으로 사랑이 마르고 각박한 시대에, 지치고 상한 성도를 안고 진정으로 울고 기도하는 참된 목자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그런가하면 목자의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함께 부등켜 안고 눈물 흘리는 성도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이 목자와 성도 간에 진정한 사랑이 있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가득 넘치는, 그러기에 치유와 회복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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