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열왕기하13:1-9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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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8.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새로워져야 죽지 않는다
나라든 단체든 교회든 개인이든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양길로 접어들지 않습니다. 생명체가 생로병사의 단계로 죽어가듯이, 나라도 기업도 단체도 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연구결과로 증명되었습니다.
처음에 작은 모습이지만 새로운 이름과 정신으로 무언가가 시작됩니다. 잘 하면 성장의 단계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하면 바로 도태됩니다. 잘 성장하면 발전을 거듭하며 절정의 단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보통 그 절정의 단계에서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누림은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곧 내리막길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죽습니다.
나라가 오래갈 수 없을까? 기업이 장수기업이 될 수는 없을까? 경영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연구했어요. 그리고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것은 늘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성장과 발전이 절정에 단계에 이르기 전에, 늘 새로워지는 것이 기업과 단체의 생명이 오래가는 비결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원리를 경영학에서는 Defusion Curve로 표현했어요. 영어의 알파벳인 S자의 모양과 같습니다. S자는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내려갑니다. 사양길입니다. 그러니 정상에 이르기 전에 절정에 이르기 전에 뭔가 새것이 새로운 것이 시작되어야만 사양길로 들어서지 않고 그러니 계속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생산업체는 새로운 물품을 출시하는 것입니다. 핸드폰이 새로 개발되어 신제품으로 출시하면 인기가 좋습니다. 새로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잘 팔리기 시작합니다. 성황을 이룹니다. 그대로 가면 성공하겠지요. 그런데 그래서 그 물품 하나가지고 버티고 견딥니까? 그렇지 않지요. 한 참 팔릴 때에 더 좋고 새로운 물품을 출시하지 않으면, 곧 죽는 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선보이고, 판매 절정에 이르기 전에, 절정에 다다르기 전에 또 새 제품을 개발해서 선보이고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지요. "아니 이것도 쓸 만한데 또 신제품이 나왔어?"
이 모습을 인문학적 용어로 '개혁'이라고 합니다. 전통과 개혁사이에는 늘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이 없으면 전통도 죽습니다. 전통이 유지되기 위하여 늘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에는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선민, 그리고 여호와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 이 나라가 유지되는 길은 신앙적인 개혁이었어요. 신앙적인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든 교회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있는 모든 제도적인 장애들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강물처럼 잘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병적인 요소들은 치유되고 다시금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남왕국 유다에 비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신앙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여로보암이 나라를 세울 때에 금송아지를 세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했어요. 이후의 왕들이 때때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좋으신 하나님이 나라를 살려 주시고 또 살려 주시고 지탱케 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의 이 금송아지 신앙의 발단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 것이었어요. 한 마음이 아닌 두 마음을 품은 모습이지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야 하는데 인간적인 생각이 스며든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성전 예배를 거부하고 대신 이스라엘 땅, 벧엘과 단에 제사드리는 곳을 세웠습니다. “백성들이 남왕국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내려가서 제사를 드리게 되면 마음도 빼앗길 것이다.” 라고 생각한 여로보람이 예루살렘에 내려가지 않으려면, 성전 지성소에 있어야 할 언약궤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 대체할 그 무엇으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을 내려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개혁해야 하는데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거꾸로 바알신앙까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서부터 바알숭배가 더 강해졌습니다.
개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후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예후는 아합왕의 신하였죠. 저가 엘리사로부터 왕의 임명을 받게 되었어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하여 아합왕의 아들인 이스라엘 왕 요람을 죽이고, 아합왕의 아들들 70명을 죽이고, 이세벨을 죽이고, 요람왕과 친하다는 이유로 남왕국 유다왕 아하시야를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지요. 여하튼 권력의 매력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마치 늪과 같아서 거기서 빠져나올 자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의 현장을 보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예후가 바알신상을 깨뜨리고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하지 못한 일이 있으니 바로 이 금송아지 신앙을 뿌리 뽑지 못하고 내버려두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조종하고자하는 정치적인 야심 때문이었어요. 이 죄악 된 모습이 이스라엘 왕들에게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이해하시고 이제 13장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칠년을 치리하며 2.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아하스 왕이 17년간 나라를 다스리는데 선왕인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다” 고 했습니다. 어떤 죄인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금송아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잘못된 신앙이죠.
여호아하스 왕은 이렇게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 시조왕으로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것 아니겠는가? 앞서간 열명의 왕들이 지켜왔는데 내가 굳이 버려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래도 지금까지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되지 않았는가? 왜 굳이 금송아지를 없애고,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라고 허락해야 하는가? 그 위험한 모험을 내가 왜 시작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익숙해진 일들이 있습니다. 세상풍조가 그런 것이죠. 넓은 길, 넓은 문이 그런 것이고 시대의 대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성공지상주의, 인본주의, 지독한 개인주의, 다원주의......,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업의 현장에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가운데에도, 쉬운 말로 “좋은게 좋은거야~!”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풍조가 문화가 되고, 상식이 된다고 해도, 성경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된다고 하면, 과감하게 버리고, 말씀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이 보지요. 믿음을 가진 자들 중에 이 풍조에 휩싸여,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 많이 있어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기도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 생각은 뒷전입니다.
그러니 쓰임받는 것으로 감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내 뜻과 내 의가 앞서고, 세상과 발을 맞추는 것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걸어야 하는데, 때로 그러다가 때로 세상과 발을 맞춰 걷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거룩을 추구하는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산위의 동네가 되게 하시고, 등경위의 등불이 되게 하셔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마침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세우시는데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니, 그 깊은 단계의 기쁨과 보람을 누리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여호아하스에게 기대한 바가 그것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니 어중간하게 개혁의 흉내만 내지 말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라. 이 개혁은 어떤 큰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가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선포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진리에서 멀어져간 백성들은 바른 진리의 말씀에 깨닫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으며 기도하게 되는데, 그러면 벌써 부흥이 시작되고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나라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다시금 회초리를 드십니다. 본문 3절과 4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람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셨다고 했어요. 이스라엘이 학대를 받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여호아하스가 회개하며 여호와게 돌아옵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 다시금 나라를 건져주십니다.13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구원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가 의인으로 주의 선지자로 거하고 있으니 그를 통해 다시금 그 학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어떻게 잡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늘 개혁해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한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합처럼 예후처럼 요람처럼 여호아하스 처럼 금송아지를 마음에 우리의 심령에 남겨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적 불완전한 신앙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진리의 말씀에 거하시므로 말씀을 통해 주시는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심령이 뜨거워지고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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