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계시록3:14-22 개역개정
-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라 (Restore Your Spiritual Passion!)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일까요? 앙케이트 설문조사를 통해서 알아보니 그것은 Mother, ‘어머니’ 였습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품인 사랑, 그 사랑의 가장 숭고한 모습을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들을 통해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랭크된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Passion, 열정이었습니다. 왜 열정이겠습니까? 열정은 일을 이루는 에너지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저들에게 남다른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정이 식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겨우 겨우 맡겨진 일이나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식으면 가급적 뒤로 미루면서 뭉그적거립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안되는 것도 되게 하기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때로는 밤을 새워 연구하기도 하고, 앞서 간 기관을 수 없이 탐방하고, 관계자들을 수없이 만나고, 그러면서도 지칠 줄을 모릅니다. 누가 반대하거나 안된다고 말을 하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름불에 물을 붓는 격입니다. 불길이 더 확산됩니다. 세상말로 소위 오기가 나서 더 열심히 합니다. 그러니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열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냉냉한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에 참여해보면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싸늘해요. 그러나 열정이 가득한 교회는 다릅니다. 성도들의 얼굴표정부터 달라요. 화기애애합니다. 담임목사가 뭐 하자고 하면 순식간에 하나가 되어 일을 처리합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면 여기, 저기에서 ‘아멘’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고난이 닥쳐와도 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벽기도회가 살아나고 기도소리가 진동을 합니다. 열정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자~! 우리가 이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마지막으로 소개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만납니다. 안타깝게도 이 교회는 하나님의 칭찬이 하나도 없습니다. 책망만 받아요. 무엇이 문제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다 하는 열정이 식어버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뜨뜨미지근한 교회였습니다. 왜 그런 모습이 되었는가? 자기만족이었습니다. “이정도면 됐어~!” “평균이상은 되쟎여~?” 착각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자기만족에 빠져들었을까요? 도전이 없는 저들의 풍요로운 삶 때문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양모산업, 특히 검은 양모가 많이 생산되어 그 수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참 아니러니 하지요. 물질의 풍요가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데 세상도, 교회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먹고 살만 했습니다. 파티를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먹고 싶은 것 먹기로 하면, 부족함이 없이 먹을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부요한 이 교회를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외적으로 물질적으로 사는 수준으로 볼 때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었다 고 평가하셨습니다. 이런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 무엇을 얻기 위해 악착같이 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석사과정으로 유학할 때에 저의 교수님에게 2년간 다녀야 할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 한국학생들의 경우 한인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저는 선교사이기도 했고 그러기에 미국교회를 제대로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소개받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라고 하면서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첫인상이 이것은 아닌 거에요. 교회는 컸습니다. 교인들의 모습은 대부분이 노랑머리 푸른 눈의 백인들 중심이었어요.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였어요. 게시판에는 이 나라 저 나라 파송받은 선교사들의 가족사진과 각 나라의 깃발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분명히 물질적으로 다른 나라 선교에 보내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참여하는 성도를 보니 유색인종은 아프리카에서 온 한 가정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저희 아시안 한 가정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도 환영하는 성도도 없고, 끝나고 다과를 하는데도 가까지 다가오는 성도가 없고, 선교하는 교회 맞어?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교회는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맞습니다. 그런데 물질로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에게 물질 지원하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많이 살고 있는 각 나라에서 이민 온 유색 인종에 대해서는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파송한 선교사가정들도 전부 백인들이었습니다. 자신들끼리 똘똘 뭉쳐있어서 영적인 만족을 구가하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정도 하면 됐지, 여러 나라에 선교사 보냈고, 물질로 지원하고....,” 그러나 정작 가까이 있는 전도해야 할 이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복음전파는 선교사들의 몫이었지 자신들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개인에게 부여된 이웃을 향한 전도의 열정이 식었습니다.
한 달을 다니다가 도무지 영적으로 충족이 안 되어, 배울것이 없겠구나~! 생각하여 다른 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매디슨 스퀘어 교회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가난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유색인종들, 흑인들이 많이 참석하고, 멕시칸도 그리고 아시안들도 골고루 참여하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인은 약 천명 정도로 2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첫날 저와 아내와 자녀들이 그 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는 아침에,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그 교회의 성도가 저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오셨냐고 하면서 친절하게 묻더니 환영한다고 자기의 이름은 마샤 라고 하면서 괜챦다면 예배 후에 자신의 집에 점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랍지 않아요?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절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그 성도의 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알고 보니 담임목사님 누님 이었습니다. 새로운 얼굴, 새로 온 사람들에 대한 관심, 가만 보니 모든 교인이 거의 그랬습니다. 곧 바로 제가 머물고 있는 지역에 있는 베다니 구역에 소개가 되었고 그곳에서 2년간 구역원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미국교회의 깊은 곳 까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구역장이 또한 권찰 되시는 분이 얼마나 친절한지요? 열정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헤어지게 되었지요. 구역원들이 모두 졸업식에 참여하고 아쉽지만 선교지로 돌아와야 하니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6년 뒤에 안식년을 맞아 다시금 아제는 캔터키주에 있는 신학교로 가서 박사과정을 가게 되었는데 저와 아내가 온 것을 알고 세상에 차로 여섯시간의 거리를 마다않고 제 생일날, 그 구역원들의 보내 준 선물과 일일이 쓴 손편지를 가지고 이 구역장님 내외분이 찾아온 거에요. 사람을 향한 개인을 향한 주의 사랑으로 나누고자 하는 그 열정이 넘칩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이 교회는 한 큰 백인 중심의 교회에서 그 교회가 전도의 열정이 식어가니, 전도가 교회의 사명인데 생각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저들이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종의 벽을 넘어 백인들이 꺼리는 유색인종이 많이 사는 가난한 동네을 찾아 그곳에 새로이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설립의 목적이 전도와 선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도의 열정을 기뻐하셨죠. 제가 그 교회를 떠난 이후 그 교회는 또 다른 지역에 같은 형태의 제2의 교회를 개척해서 그 교회도 같은 모습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그러기를 바랍니다. 이 복음의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39년간 해외선교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교는 전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집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역사회에서 전도하지 못하면서 해외선교? 내 이웃에게 복음으로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는데 해외선교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성도가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 그곳에 가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씨앗을 뿌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기도하고 물질로 드리면 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법의 선교도 있어요. 그러나 그러한 선교의 형태는 서서히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어 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내가 뜨겁기 않으면, 내가 경험하지 않으면, 내가 전도와 선교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열정이 식어져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 교우의 선교사화~!” 이것이 제가 강조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게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우선 지역 전도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서 “오늘은 민족~!”이라는 슬로건이 먼저 오지요. 그리고 나서 “내일은 세계~!”의 슬로건이 따라 옵니다. 그 뜨거운 구령열을 가지고 선교현장에 가서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년부터 항공료 30프로씩 지원하면서 학생들은 비젼트립으로, 청년들은 단기선교로 나갑니다. 어른들은 선교지 탐방이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은 홍콩으로 청년들은 태국으로 역시 학생들은 교회의 재정으로 지원하고 장년들은 자비로 네팔로 갑니다. 저변확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교우가 전도와 선교적 열정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선교사도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 중에 말이지요. 주님 오시는 날까지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또한 우리 주변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그들 중에 다문화가정의 이웃들....., 선교지가 이제는 저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여기에서 금천구도 우리의 선교지가 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연히 헌신이 따르지요. 시간 내야지요. 물질 들어가지요. 인도자매가 영아부 담당교역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소통을 위해 언어도 익혀야 하지요. 그러나 이런 교회, 복음의 열정이 가득한 교회, 주를 위한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교회, 복음의 열정으로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이십니까? 14절에 말씀하십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 말씀은 라오디에아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상기하면서 반대편에 서 계신 주님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라오기에아 교회, 2절에 말씀합니다.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고.....” 그러면서도 17절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다” 그러니 주께서 책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 반대편의 모습, 열정과 열심과 헌신과 충성의 모델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등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멘이시요”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을 요구하셨을 때에, “못합니다” 가 아니라 “아멘~! 제가 수종 들겠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십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합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이는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 하나님께 충성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아 보아라, 내 모습을 보아라 그리고 헌신과 충성을 회복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는 빌립보서 2장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시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기 아니하시고....”
그렇게 종의 모습으로 인류의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충성, 헌신의 모습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신 것입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아멘~!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아멘~!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아요. 과거에 비해 얼마나 부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도전이 없어요. 영적 착각 속에 빠져 있어요. 이정도면 됐다. 우리는 이대로가 좋다. 그 모습을 보시면서 경고의 나팔을 울립니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8절 말씀이지요.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라는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내일 계속 이어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도 주안에서 주를 향한 열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