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계시록11:1-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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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핍박당하는 교회, 다시금 영광이 회복되는 교회
오늘날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교회가 핍박당한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짧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만 생각해 보더라도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이 그 중에 한 예가 되겠습니다. 3.1만세운동이 있은 후에 이 지역에도 만세운동이 일어나니 일본군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습니다. 일본의 아리타 부대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말하여, 제암리 감리교회로 마을주민들을 모았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교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습니다. 왜 기독교인이 독립운동을 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죠. 그때에 안종후 권사님이 기독교 기본진리를 말했습니다. 저가 듣기는 들었으나 믿지는 아니하였고 밖으로 나와 일본군에게 교회 안에 성도들을 향하여 발포를 명령하였습니다. 이때에 23명의 성도들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일본군은 사격이 끝난 후 만행을 감추고자 그 예배당 안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가 끝이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제암리 교회는 재건이 되어 믿음이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로 든든히 서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오늘날도 저 중동국가들 중에서 과격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 또한 인도와 네팔과 같은 곳에서 강경 힌두교도들에 의해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핍박 속에서도 놀라운 것은 교회는 성장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진리는 밟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핍박을 당하나 그것이 오히려 더 강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음을 지난 2천년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11장은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니 결국 승리자의 모습으로 영광의 모습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으로 들어가시겠습니다.
1절 말씀에 보니 사도요한은 천사로부터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사람들을 측량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이 측량의 목적은 구별하여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말세에 핍박받는 교회의 모습과 그 안에 신실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니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성전 바깥마당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성전 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이방인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말씀은 지팡이와 같은 갈대로 측량한다는 말씀은 구분을 짓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믿는 자들과 성전 밖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의 구분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믿은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들로 구분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말세가 되면 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사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장차 주님 오시기 전에는 더욱 극심해 질 것입니다. 2절 후반부에 보니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여기에서 마흔 두 달은 날로 셈하면 1,260일이 됩니다. 3절에 명시되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핍박당하는 날의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1,260일인가 하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달로 나누어 셈하면 3년6개월의 기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숫자 아니겠습니까? 엘리야의 때 가뭄이 지속되었습니다.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혼내시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백성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뿐인 아들과 함께 떡을 해 먹고 죽겠다는 사르밧 과부의 얘기가 등장합니다. 그 비가 오지 않는 날들의 기간이 바로 3년 반이었습니다. 그러니 3년 반은 환란의 때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던 기간입니다. 이 3년 반은 고난의 날로, 환란의 날로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11장 6절에 표현됩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여기에서 그들은 누구겠습니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엘리야 선지자요, 또 그 외에 엘리사나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주의 종들일 것입니다.
이 모습에 대하여 3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 모습은 구약시대에 선지자들과 같은 주의 종들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일깨우는 주의 종들이죠. 말세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자신들의 향락을 추구하는 세대를 향하여 저들에게 임할 대환란을 미리 바라보게 되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슬픔의 베옷을 입고 말씀으로 전하고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다 증명하기 위하여 때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 이들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했습니다. 어느 학자는 이 두 감람나무와 촛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구약, 또 하나는 신약 그렇게 해석을 했어요.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문맥상 환란의 때 삼년 반 가뭄을 예언하고, 그리고 멸망할 민족을 바라보면서 슬픔에 차서 베옷을 입고 출현하는 주의 종들의 모습 또한 5절에 보면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등을 서로 연결해 보면 너무 분명해지죠.
여기에서 말하는 두 감람나무는 곧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말씀으로 증거하는 주의 종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촛대라고 했는데 이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들의 모임을 상징적으로 촛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 천부교(天父敎)라는 이름으로 신흥종교단체를 세웠던, 우리에게는 전도관으로 잘 알려진 한 이단종파의 설립인인 박태선 장로가 자신을 가리켜 ‘감람나무’라는 별칭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정말 그랬다면 그렇게 잘못된 교리로 신도들을 미혹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결국 그 모습은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며 용두사미의 모습으로 사라졌습니다.
3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 주의 종들에게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5절에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를 해하고자 하면 그들이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이 원수를 삼켜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를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같은 주제로 다음절로 연결됩니다. 6절입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 말씀을 대할 때에 실제로 이와 같은 권능을 행했던 엘리야가 떠오르고 또한 나일강을 피로 물들게 했었던 모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모든 권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향하여 죽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향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시기 위해 주의 종을 사용하시는 모습입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써 그리고 지난 24년간 선교지에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했던 자로써 이 권능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인 힌두교도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하니 더욱 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했습니다.
“전도자로써 선교사로써 이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금식으로 기도하며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사도바울의 제일 부러웠습니다. 그는 수 많은 능력을 행했습니다. 혀의 권세~! 입에서 불이 나온다고 오늘 본문은 표현했습니다.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능통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곳에 가서도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언어를 잘 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영어는 기본이고 현지어를 잘 해야 한다. 혀의 권세는 그렇게 시작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로마의 시민권,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이 있어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로마의 시민권은 미국시민권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미국 시민권이 있다면 북한에도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주시지 않으셨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바로 주의 종이 가져야 할 권능, 기도하면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물러가고, 영혼이 살아나고....하는 영적파워가 제일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사모하며 금식하며 기도하게 되었는데 주께서 저에게 주시는 음성은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순교를 부러워하느냐?” 이 주의 음성은 그날 저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렇구나!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았구나! 그가 고백했습니다.
“주의 은혜의 복음을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일사각오 순교의 정신으로 복음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날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많이 울었습니다. 생각되었습니다.
“내가 가야할 선교사의 길이 순교자의 길이 아니면 안되는 구나! 그 정신과 각오가 없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겠구나! 그처럼 부러워하는 사도바울의 영적파워는 꿈도 못 꾸겠구나!”
그리고 결단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주님 앞에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내 생명을 드리겠으니 복음전파에 필요한 능력을 이 종에게도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후 정말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나서 한 마을이 전체가 우상을 섬기던 마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세워지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추장의 딸이 병고침을 받으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아이타 산지족 마을에 복음이 확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에게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세상을 깨우치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말씀합니다. 이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가 고난을 당합니다. 심지어 죽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들을 죽일 터인 즉” 누가 죽입니까? 적그리스도가 주의 종들을 죽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세례요한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1절,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당한 자를 특별히 대우하십니다. 구약성경에 엘리야가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갔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땅에 살아가는 날이 길어야 100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지 않고 저 하늘나라로 이어져서 영원한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지어진 존재이지만 영적인 일을 등한시하고 이 땅에 살아갑니다. 말세 환란의 날에 저들은 심판을 받아 고통 속에 죽지만, 13절의 말씀이 그것이지요. “그 때에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러나 이 땅에서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 저편 지옥이,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못이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를 위하여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지금 내가 건강 있을 때에, 말씀 속 감람나무와 같이 또는 촛대의 지체들로써 복음전하며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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