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여호수아11:6-9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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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
7.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 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할 때에
8.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기 때문에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추격하고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추격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죽이고
9.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로 살랐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두려움 없이 전진하려면
어제 우리는 말씀을 통해 ‘두려움’에 대하여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람의 감정 중에 ‘두려움’이란 그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가? 죄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죄의 근원은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두려움의 감정이 있었을까요? 없었어요!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두려워할 만한 것도 없었어요. 그러기에 낙원이요, 파라다이스였습니다.
아담의 아내인 하와가 옛뱀이라 일컫는 사탄을 만났을 때, 그 사탄의 모습에 두려워하였나요? 그래서 숨었나요? 그러지 아니했어요.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사탄과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속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때 처음으로 그들의 심령에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서늘한 바람이 부는 저녁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교제하시기 위해 에덴동산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 마음에 두려움이 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부르세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의 장면이 창세기 3장 9절에 있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있느냐” 그럴 때 아담이 답을 합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3장 10절 말씀이에요.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두려워하여 숨었다” 라고 했어요.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 ‘두려움’입니다. 이는 죄의 결과요, 죄성의 증거입니다.
이 후로 이 ‘두려움’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야레’ 또는 ‘마고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 뜻이 두려움, 공포, 겁내다, 무서워하다 라는 뜻이에요. 이 단어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 이후로 성경에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무려 오백열여덟번이나 등장해요.
그러므로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본애 이 ‘두려움’의 감정 대신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주셨을까요? 성경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아멘~!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어제도 말씀으로 나누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가능한 것이에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어지는 13절에 말씀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2:13) 혈통으로나! 유대인의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육정으로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믿기 때문에 자녀가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사람의 뜻! 어떤 왕이나 임금이나 권세있는 자가 “너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고 인정하고 선포해서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라고 했어요. 이는 하나님의 계획, 작정, 전적인 은혜로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십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요. 불확실한 미래라고 했습니다. 불확실한 건강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예기치 않은 전쟁이나 사고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죽음일 것입니다. 사망이에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요양원을 운영하는 교우에게서 들었습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거에요. 어떤 한 어르신 할머니는 교회를 몇 십년 넘게 다닌 권사님인데 죽음이 다가오면서 그렇게 두려움에 무서워 떨며, “나는 죽을 수 없다고, 죽을 수 없다!”고 뻐팅기다가 운명하셨는데, 그 죽음 이후의 모습이 끔찍하다고 했어요.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그렇게 오래 신앙생활을 했지만 소위 나이롱! 신자요, 예수를 헛 믿은 것이에요. 하늘나라를 믿지 못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요양원에 지내고 계신 한 할아버지는 역시 교회를 오래 다니신 집사님이신데, 삼 일 전부터 요양간호사에게 자주 고백하기를 “주님이 나를 오라고 불러요. 내가 이제 하늘나라 갈 겁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리고 삼일 후에 주무시다가 소천하셨는데 그 표정이 그렇게 평안해 보일 수가 없다고 했어요.
우리가 이 죽음을 초월하는 주의 사랑 안에 거하면 두려움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로마서 8장 38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옵니다. 그런데 내게 닥쳐오는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분명 저 하늘나라를 내 영혼의 본향으로 믿는 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다가오는 태산과 같은 장애물과 큰 파도와 같은 세파 속에서 어떻게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전진해 갈 수 있을까요? 가장 큰 요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견고한 믿음! 확실한 믿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 이라는 믿음이에요. 우리가 찬송으로 불러요.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말라 하시고 물결 위 걸으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여호수아가 이 믿음이 있기에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성경본문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11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수11:6) 이 말씀을 들은 여호수아는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 다음절 7절이에요.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 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할 때에”(수11:7) 가서 습격하였어요. 지체없이 행동하였습니다. 이 행동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믿음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은 두려움도 떨쳐낼 수 있는 믿음이요, 그러기에 지체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길 수 믿음이었어요. 그 결과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있기에 이 믿음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를 합니다. 실제 얘기에요.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호랑이를 잡은 사냥개 얘기입니다. 개가 호랑이를 잡다니 말이 됩니까? 지나가던 소가 웃을 얘기에요. 그런데 사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지방신문에 게재되어 알려진 실화입니다.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강동만집사라고 하시는 분이 계신데요. 취미가 야생 동물 사냥입니다.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어요. 그가 어느 날 눈밭을 달릴 수 있는 스노카를 타고 폭설이 덮힌 도시 근처의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슴이라도 한 마리 사냥하려고 간 거에요. 곁에는 항상 함께 하는 두 마리의 사냥개가 있었어요. 이 강집사님이 쉴려고 스노카를 잠깐 멈추었는데 갑자기 이 두 마리 사냥개가 쏜살같이 차에서 뛰어내려 뛰어가는데 미처 잡을 새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강집사님의 귀에 산이 떠나가라 짖어대는 개들의 소리가 들려왔어요.
“사냥감을 잡았구나!” 강집사가 소리나는 곳에 도착했을 때, 사냥개들은 소나무 위를 쳐다보며 짖어대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스노카를 나무 가까이 대고 위를 쳐다봤어요. 순간 세상에...., 하타터면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집채 만한 호랑이가 머리 위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순간 그는 살아야 하니까 반사적으로 총구를 겨누었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 탕!” 그러자 나무 위에 있었던 호랑이가 쿵 소리를 내면서, 땅으로 떨어졌어요. 땅에 떨어진 호랑이의 몸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습니다. 정말로 눈 깜짝할 만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겨우 정신을 수습한 강집사는 호랑이를 집으로 운반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호랑이 고기로 파티를 열었어요. 귀한 호랑이 고기로 하는 바비큐 파티니까 여러 인사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 죽은 호랑이의 박제만 보아도 섬뜩할 정도로 당당한 위엄이 느껴지는 호랑이였는데요.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 굉장한 짐승이 보잘 것 없는 사냥개 두 마리에게 쫓겨서 강집사의 손에 잡히게 되었는가? 그게 이해가 안되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호랑이가 개를 잡은 것이 아니라 사냥개가 호랑이를 잡은 이 사건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개는 호랑이 앞에 서면 오금도 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데 오히려 호랑이가 쫓김을 당했어요.
심리학에서는 이게 설명이 된다고 합니다. 자, 보세요! 강집사의 사냥개들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주인의 총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짐승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무서운 곰을 몇 번 사냥한 적도 있었어요. 자신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던 어떤 동물도 주인의 총구 앞에서는 마른 짚단처럼 픽픽 쓰러져 버렸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이 되면서 사냥개들의 마음속에는
“내 뒤에는 주인이 있고, 주인의 총 앞에서는 쓰러지지 않는 짐승은 없다”는 확신과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한편 호랑이는 이날 몹시 당황했어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모든 짐승이 자기만 보면 두려워 떨며 오금을 못 펴는데....., 감히 사냥개 주제에 먼저 덤벼들며 쫓아오니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도 순간 당황하고 만 것이에요. 잠깐 자신의 정체감을 잊어 버린거에요. 내가 누군가? 자신이 호랑이인줄도 잊은거에요. 이 비정상적인 사냥개의 선제공격에 기선을 제압당한 호랑이가 다급해지자 소나무 위로 피했고, 이어 강집사의 총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요점은 무엇입니까? “내 뒤에 주인이 계시다!” “내 뒤에 주인이 계시다! 그러니 내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 여러분!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들 붙들리라”(사41:10) 믿음대로 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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